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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 또 다른 영화가 시작되다

By 장지애

 윤지혜 감독의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는 스크린과 관객석 사이의 거리에서 기억이 틈입 되는 순간을 포착하며, 영화와 관객 사이를 유영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라는 영화 제목은 박완서의 단편소설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하는데, 영화 속의 영화인 <미로 위의 산책>이라는 제목과 호응하며 영화를 스크린 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밖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상영 중인 영화관에서 걸어 나오는 하나의 발걸음이 있고, 잠들어버린 관객들이 있다. 그리고 연인과 함께 영화를 관람 중인 주인공 민영이 있다. 내레이션으로 떠도는 민영의 목소리는 <미로 위의 산책><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라는 두 편의 영화 모두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사건이 부재한 윤지혜의 영화에서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목적 없이 방황하는 민영의 발걸음이 거의 전부다. 영화 속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지만, 민영은 연인과의 헤어짐을 상상하는 중이다(그것은 민영의 상상일 수도 민영의 현실일 수도 있다). 아주 먼 거리에서 연인을 뒤따르는 민영의 발걸음과 결국 홀로 남겨진 그녀의 산책은 영화 속 영화로 진입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민영의 산책은 <미로 위의 산책> 촬영장으로 향하는데, 이미 완성되어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촬영장이라는 과거는 마치 시간의 미로처럼 민영의 발걸음 앞에 유유히 나타난다. 시간의 층이 뒤섞이는 순간. 현실과 환영의 경계가 지워지는 마법과 같은 순간이 바로 윤지혜 감독이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려는 영화의 역량이 아닐까?

 

 더욱 독특한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부산 영화의 전당이 바로, 영화가 상영되는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이라는 점이다. 윤지혜 감독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민영이 배회하는 곳은 바로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의 눈앞에 현실적 공간으로 펼쳐진다. 민영과 민영이 마주친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은 그대로 영화를 본 관객과 민영의 관계로 자연스럽게 변모하는 것이다.

 

 윤지혜 감독에게 영화는 어쩌면 한 편의 기억 모음일지 모른다. 윤지혜 감독은 민영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영화적 기억을 한 편의 영화에 담아냈다. 불충분한 서사 속으로 관객이라는 우리의 기억을 틈입시킬 기회이다. 그것은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의 민영에게 그랬듯이, 우리 각자에게 새로운 영화가 펼쳐질 것이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난 후 또 다른 영화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