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의 희곡을 영화화한 [산불]은 6·25의 좌우대립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있는 산골 촌락을 배경으로 한다. "남자의 씨를 말려버린" 전쟁을 탓하는 아낙들의 삶은 전쟁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있고 그들의 마음 또한 피폐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상황에 대한 묘사보다는 남겨진 그들의 억눌린 욕망에 주목한다. 어느 날 인민군 탈영병인 규복이 마을에 내려오고 점례가 남몰래 그를 뒷바라지하면서 그들은 점점 가까워진다. 어느 아낙보다도 남자를 목말라했던 사월이 이 사실을 알고 둘 사이에 끼어들면서 이들의 관계는 욕망의 먹이사슬이 되어간다. 동시대의 문예영화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산불]은 역사성을 탈각시킨다. 한국전쟁은 영화의 배경이 될 뿐 주요 모티브가 되지 못하며, 카메라는 인물보다 자연을 전경화한다. 이로써 영화의 시공간에서 역사는 비워지고 그곳은 욕망만이 꿈틀거리는 공간이 된다. [산불]은 나아가 여성들을 욕망의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당시 국가-민족주의에 의해 강요된 젠더체계를 넘어선다. (박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