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침실과 거실, 그리고 적당한 햇살이 내리쬐는 안식처. 그 집에서 우리는 모두 밤에 잠든다. 그러다 새벽 혹은 이른 아침에 이상한 감각과 함께 눈을 뜬다. 꿈은 허무맹랑한 상상의 영역이기도 하고, 때로는 머릿속에서 며칠 동안 떠나지 않던 근심과 걱정이 형상화된 모습이기도 하다. 근심과 걱정은 아마 무언가 옳지 않다는 감각, 지금 내가 원하고 믿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는가 하는 영역에 속하며 우리를 그 무의식의 발밑 아래로 끌어내린다. 꿈에서 깨어나면, 옳지 않은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 혹은 그저 다시 꿈의 영역에 가두며 잊어버리게 될지는 알 길이 없다.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의 영화 <굿모닝, 나잇>(2003)은 이탈리아의 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운 사건인 알도 모로 총리 납치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시기는 1978년. 좌파 단체인 붉은 여단은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사이에서 타협을 이루어냈던 알도 모로를 납치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벨로키오 감독은 붉은 여단의 내부자인 여주인공의 관점으로 시종일관 극을 이끌며 테러로 변질된 그들의 그릇된 신념을 비춘다. 영화는 오랜 기록 영상과 극영화의 장면을 유려하게 오간다. 흑백으로 종종 등장하는 기록 영상은 붉은 여단과 알도 모로라는 인물, 그리고 파시스트와 파르티잔 등이 대립하는 이탈리아의 역사를 뒤섞으며 집단의 이념이 그릇된 신념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슬며시 은유한다.
첫 문단에서 꿈에 대한 감각을 언급했듯, 이 영화 속에서도 꿈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이념 혹은 신념들이 줄곧 대립하는 감각의 장으로 기능한다. 주인공 키아라(마야 산사)는 알도 모로를 감시하는 문틈과 TV로 형상화된 프레임 속에서 늘 진실을 마주한다. 하루의 고단함을 뒤로한 채, 그녀는 매일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든다. 꿈속에서 키아라가 속한 붉은 여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그녀가 줄곧 틈 사이로 목격한 한 인간의 모습은 끊임없이 대치한다.
키아라의 눈과 귀, 그리고 키아라가 밤마다 꾸는 꿈은 결국 스크린의 외부이자 일상에 속한 우리의 모습과 사실상 동일하다. 그녀가 문을 사이에 두고 작은 틈 사이로 보아낸 인간, 그리고 신념은 차분하고 정적인 모습과 달리 큰 파열을 일으킨다. 감금된 알도 모로(로버토 헤르리츠카)가 편지를 낭독하는 것을 문밖에서 들으며,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보는 행위는 그녀에게 도덕적 혼란을 일으키고 뒤이어 듣는 행위는 그녀의 마음에 가닿는다. 눈과 귀를 통해 뿌리내린 누군가의 신념은 그녀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밤마다 그녀를 찾는다. 그리고 그녀의 꿈속에서 알도 모로는 감금된 방 안에서 나와 집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집 밖으로 나선다.
서로 다른 이념이 대립할 때, 우리를 객관화하고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일까. 벨로키오 감독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며 25년여 전의 역사를 다시 가져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는 듯하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되는 감각이 전하는 진실이라면 귀 기울여야 함을 말이다. 옳은 진실은 결국 벽을 넘어설 것이고, 눈을 뜨고 귀를 여는 자만이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음을 전한다. 일상과 정치, 시대는 결국 어떤 형태로든 찾아와 우리의 밤을 뒤흔든다. 벨로키오 감독은 주인공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오롯이 느낀 그 감각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진실된 감각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살다 잠들게 하는 최후의 수단이지 않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