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어둑한 저녁, 피곤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넘기던 사강의 시선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문장 하나. 실연당했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따라 파란 창에 띄워진 문구가 존재감을 과시한다. 실연당했고, 스위치를 꺼버린 듯 세상이 너무 고요하고, 쉽게 잠들지 못한다. 글을 가만히 응시하던 사강이 생각에 잠긴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 심란한 표정이 보인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모르는 이의 낯선 글이 이토록 사강의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나열한 문장들이 지금 그녀의 상황과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승무원인 사강은 비록 이별했지만, 오늘도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동료들과 수다를 떤다. 헤어졌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무너질 일은 없고, 지구도 멀쩡히 잘 돌아간다. 한 가지 문제는 헤어진 애인이 직장동료라는 사실이다. 어쩌다 마주치면 지하까지 처박히는 기분을 형언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오면 불행한 과거를 상기시키는 성가신 물건들이 도착해있다. 결국 사강은 느끼고 마는 것이다. 반복되는 이 지겨운 굴레에서 자의로는 벗어날 수 없을 거 같다고. 사강의 마음을 뒤흔든 이 글의 목적은 단순한 공감과 위로가 아니다. 설문에 참여하고 모임에 나와 달라는 것. 영업은 적중했다. 전부 구질구질한 사연 하나쯤은 있는 거니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추하게 눈물을 보여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과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만 힘들고,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면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우선은 이별 후유증을 극복하는 게 중요했던 사강은 일말의 기대를 품고 조찬모임으로 향한다.
안타까운 이별을 경험하고 조찬모임에 참석한 건 사강만이 아니다. 10년이 넘는 장기연애를 끝낸 지훈 역시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모임에 등장한다. 장기연애의 끝은 결혼 아니면 이별이라고 했던가. 여자친구인 현정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던 지훈은 자신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태도를 자책한다. 하지만 이제와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리하기 위해 나간 자리에서 지훈은 현정을 마주치게 되고,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같은 시각, 사강은 한바탕 눈물을 쏟다 이 자리를 이만 피하기로 결정한다. 회피는 그리 쉽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참가자들을 맞았던 주최자는 잘 끝내야 잘 시작할 수 있다며 그들을 막아선다. 결국 두 인물은 실연품을 교환하는 절차에 참여한다. 사강이 실연품으로 내놓은 건 평생 자신을 괴롭혀온, 이름 사강이 적힌 원서 몇 권. 우연인지 지훈은 사강의 실연품을, 사강은 지훈의 실연품인 카메라를 가져오게 된다. 자석에 이끌리듯 지훈의 카메라를 가져온 사강은 필름을 인화하며 외면해왔던 과거의 자신, 행복하지만 고통스러웠던 순간들과 마주한다.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지훈 역시 카메라를 다시 찾기로 결심하면서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두 사람의 시간은 우연성에 기반한 사건의 미묘한 맞물림으로 움직인다. 영화는 사강과 지훈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사랑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상처끼리의 마주침에 주목한다. 영화는 갈무리하지 못한 과거가 그대로 남아있다면 나의 현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사랑이 저문 후에 남겨진 잔여물을 받아들이는 적당한 방식은 존재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만약 과거로 머무르지 못한 흔적들이 현재를 잠식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상처를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오롯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에 집중한다.
건조한 말투, 생기 없이 푸석한 이별한 여자의 얼굴. 어쩐지 사강의 눈빛에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당당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이 더 커 보인다. 가정이 있는 정수와 이를 아는 사강은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랑을 했다. 이별 후 공허한 자신의 눈동자에서 사강은 가장 미워하던 과거의 아빠를 발견한다. 엄마를 힘들고 외롭게 했던 아빠의 모습이 결국 자신의 지금이 되어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 사강은 끝내 이 사랑을 지키지 못했다. 사강이 정수와의 사랑을 시작한 계기는 단순하게 같은 상처를 발견한 그녀 내면의 결핍이었다. 비슷한 상처가 주는 한순간의 낭만은 진짜 사랑이었을까, 내 삶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결과적으로 사강의 사랑은 행복할 수도, 그녀를 충만한 기쁨으로 데려가지도 못한다. 다만 영화는 불편할 수 있는 그들의 관계를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랑이 끝난 이후, 남겨진 것들과 감정의 파동에 집중할 뿐이다. 사강과 지훈의 사랑은 후회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감정의 잔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그들을 고통 가운데 밀어넣지만, 그럼에도 이는 과거와 결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다.
몸에 난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 상처난 부분은 흐릿해지고, 다친 기억도 희미해진다. 마음의 상처는 어떤가. 얼마간 아프고 나면 반드시 아물게 된다는 기약이 없다. 영화가 주목하는 건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간이다. 같은 상처를 공유한 타인을 통해 나를 보고, 가장 진솔한 내면과 마주하는 인물들을 통해 영화는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권한다. 진심으로 다행인 건 살아 있는 한 빛 드는 나를 마주할 기회가 있다는 것. 계속 걷자, 원하는 속도에 맞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