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분주한 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부산스러운 움직임과 말소리가 비로소 중단되었을 때마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은 온통 충만하고 얼굴은 이리저리 꿈찔거린다. <왼손잡이 소녀>(쩌우스칭, 2025)는 어머니와 딸, 그 딸의 딸들이 살아가며 빚어내는 소음이다.
영화는 쉬펀(차이수전)이 스무 살 딸인 이안(마쉬유안)과 여섯 살 딸 이칭(니나예)와 대만으로 이사를 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쉬펀은 야시장에 작은 국수가게를 차려 가족을 책임지려고 해도, 근근한 벌이로는 세 식구를 먹이기에도 빠듯할뿐더러 남편의 병원비까지는 도저히 충당할 수가 없다. 이러한 곤궁을 해결하고자 쉬펀은 친정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쉬펀의 여동생들은 독립해 가정을 꾸리고도 집에 손을 벌리는 언니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정말이지 내가 아닌 내 가족의 곤궁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감내해야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가족의 곤란이 나와 분리될 수가 있을가. 그렇다면 감당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내가 선택할 수 있기는 한가.
언뜻 영화는 쉬펀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카메라가 줄기차게 좇는 것은 이칭의 쉴 새 없는 움직임이다. 몽롱한 신디사이저의 음이 이칭의 나들이의 배경이 된다. 카메라는 이칭의 눈높이에서 색색으로 반짝이는 야시장의 골목을 헤집고 다닌다. 흘러넘치는 소란을 익숙하게 통과하는 이칭의 옆에는 언제나 엄마인 쉬펀보다 언니 이안이 자리한다. 영화는 각자의 사정으로 온통 바삐 소리치는 어른들 대신 그 언저리에서 묵묵히 요동치는 이칭과 이안을 고집스레 담아내고, 이를 통해 관객이 두 사람과 동행할 수 있게 한다. 영화 속에서 방치되다시피하는 이칭과 이안은 관객과 공모할 수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 이러한 영화의 애정 어린 시선은 인물을 섬세하게 다루는 동시에 두 사람에게 힘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화 초반부부터 어른들이 준비하고 신경 쓰던 가족잔치에 와서야 두 사람이 비로소 정식으로 발화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가족 잔치에서의 한차례 소동이 지나간 후, 이안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다. 그리고 이칭을 불러 자신과 나란히 단상 위에 오르게 한 후, 마이크를 들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닌 '내가 해야 할 말'을 직접 발화하게 한다. 이는 왼손은 악마의 손이라며 오른손을 쓰라고 종용하던 할아버지를 이안이 이칭의 손을 붙들고 직접 찾아간 장면과 겹쳐진다. 영화는 인물을 그저 방관하지 않는다. 힘 있게 움직이는 인물을 끈질기게 쫓아 붙고, 이는 인물을 더욱 생동하게끔 북돋는다.
아이의 눈높이를 따라가는 카메라,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의 유사점으로 인해 <왼손잡이 소녀>가 <플로리다 프로젝트>(션 베이커, 2018)와 함께 거론되는 것 같다. 게다가 실제로 션 베이커가 이 영화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닮은 듯 비슷한 두 영화에서 <왼손잡이 소녀>가 두드러지는 지점은 영화의 배경을 삼대째 이어지는 가족으로 함으로써 사회문화적 힘에 압도되기에 앞서 인물 간 복잡한 관계망을 섬세하게 포착한 것에 있다. 게다가 <왼손잡이 소녀>는 소음과 빛이 가득한 대만 야시장의 에너지와 특유의 투박한 베란다와 좁은 공간의 주거지를 화면 가득 실어놓았다.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딸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다가오든 무엇이든 괜찮을 것 같다.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