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시민평론단 - 비전

<흐르는 여정> : 소멸하지 않는 각자의 세계에서

By 오민지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질문과 마주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행복할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면 그건 성공한 삶일까? 한순간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외로움을 우리는 무엇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마지막을 내가 결정할 수 있을까? 머무르는 자리마다, 지나온 시간마다 문득 숨겨둔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괴롭히는 근원적 질문들. <흐르는 여정>은 남편과의 사별 후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중년 여성 춘희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녀와 모자 관계만큼의 끈끈함을 형성하는 민준, 성찬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질문들을 헤매는 사이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타인과의 진정한 교류가 가능한지, 내게 필요한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찰하는 데 집중한다.

 

  전혀 모르고 나이 차의 간극도 큰, 심지어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이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영화는 이에 대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답을 내놓는다. 연결 고리라고는 없어 보이는 세 인물 춘희, 민준, 성찬은 피아노와 가족이라는 공통분모로 인해 친해지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터놓을 수 있을 만큼 서로가 편해진다.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울기보다 웃고, 여러 상황에 긍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하는 춘희는 현실보다 사랑과 낭만을 따르는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서툰 한국어로 반말을 해대는 민준에게는 쉬운 설명으로 존댓말을 가르치고, 말도 없이 피아노를 포기하겠다며 사라진 성찬에게도 화를 내기보다 그의 말을 먼저 듣고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를 건네기도 한다. 이러한 그녀의 따뜻한 면모 바탕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담겨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이 전부 상실의 경험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춘희는 남편과 사별했고, 민준은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를 만나러 한국에 들어왔으며, 성찬 역시 부모를 알지 못한다.​ 자식이 없는 춘희에게는 어느새 두 아들이 생겼고, 민준과 성찬에게는 두 번째 어머니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얼마간 서로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준다. 어쩌면 오히려 불완전한 상태에서 서로를 만난 것이기에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물들이 겪은 각자의 상실은 이상하고도 적당하게 맞물리며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형성한다. 세 사람이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순간, 특별한 사건이 생길 때, 춘희가 서툰 실력으로 연주할 때 흐르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몰입을 돕는 동시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은 죽음과 상실이며, 이는 곳곳에 등장하는 잔잔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홀로 있는 춘희의 뒷모습을 비추며, 혹은 인물들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비슷한 결이지만, 마음을 울리는 내용의 말들이 반복된다. 헤어지면 곧 다시 만나게 된다는 간단한 진리, 지나고 흘러가는 삶의 순환 과정, 삶과 죽음 즉 만남과 이별은 슬프지만은 않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말하는 담담한 목소리. 영화는 다시 찾은 가족의 의미를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조명하면서도 인물의 부재를 암시하는 메타포를 심어둔다. 이를테면 춘희의 선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내레이션, 나경과의 대화, 마지막이 된 세 인물의 동행 같은 것들. 나경은 춘희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자 그녀와 긴밀한 소통을 통해 죽음을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춘희의 결단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영화는 나경을 굳이 방관자의 위치에 두거나 그녀의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경은 나름의 방식대로 상실의 슬픔과 깊은 고독을 견디려는 춘희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사람과 추억은 잊지 않는 한 각자의 기억 안에서 소멸하지 않고 존재한다. 춘희가 스위스로 향한다는 건 결국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는 춘희의 결정을 명확히 보여주기보다 그녀의 마지막 여행 이후 남겨진 이들의 일상을 비추며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후반부, 민준과 성찬의 콘서트를 바라보는 춘희의 모습은 환상이었을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돌아와 살기로 결심한 건 아닐까. 영화는 춘희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어느 관객의 기대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중요한 건 '사는 사람'의 결정, 마음, 미래. 그들의 앞날이 언제나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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