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산양들> : 어디서도 뛸 수 있어, 우린 특별하니까
유재욱 감독의 <산양들>은 동물 사육장에서 시작된다. 귀여운 여주인공 4명이 고3이라는 점을 미루어보았을 때 언발란스한 시작일 수도 있겠다. 흔히 고3때는 아주 큰 삶의 뿌리를 결정한다고 할만큼 진로 결정이 가장 큰 이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해운대 우동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래서 영화제라 해운대를 올 때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는데, 이번에도 동백섬을 산책하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학교에서는 주말마다 동백섬으로 산책을 갔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가기 싫었던지 학교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는 육교 밑에 친구와 함께 숨었다가 따라가지 않기도 했었다. 사실 성인에 가까운 고3이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한다고 싶기도 했지만 아직 어리지 않은가? 하하
아무튼 그런 나도 고3 때는 뭐먹고 살지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진로를 물어봤을 때 내가 그렇게 대답해서 선생님이 우스워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튼 해운대에서, 그리고 동백섬을 산책한 날, 내가 <산양들>을 본 것은 참 우연적이면서도 볼 수밖에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여기 네 꼭지점에 뿔뿔히 흩어져있다 모인 4명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 왜 생각하지 않냐고 타박받는다. 이상하리만큼 변두리적 특징을 갖는 4명은 자신의 위치성을 크게 불안해 하지 않는다. 불안해 하기보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안정을 찾고자 한다. 그것이 외부에서 보기에는 애들이 불안해 보이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이러한 지점이 네 주인공의 비범한 지점 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되게 소시민적인 나는 외부의 시선보다 스스로를 더 불안해 했던 것 같다. 그건 기질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이 비범한 친구들은 남들이 모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본인의 진로보다 자신들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향해 소신껏 밀고 나간다. 학교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면접보다 자신의 마음이, 그리고 사육장의 동물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4명의 이러한 지점이 대단해 보였다.
사육장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동물들을 지키기 위해 비밀 아지트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별나게 소신있는 이 4명은 힘들 모아 비닐하우스를 지어버린다. 그리고 아주 단란하고 아기자기하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구축한다. 하나의 방공호와 같은 이곳은 그들을 온전하게 품어주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갈등은 생기는 법, 그들의 공간도 사회 내 억압에 완전히 자유로운 유토피아가 될 순 없었다. 자신들이 데려온 오리, 닭, 토끼들 중 토끼는 야생동물에게 물려죽기도 하였고, 닭과 오리들은 조류독감으로 인해 폐기되고 말았다.
이렇게 예방접종까지 맞히며 애지중지 키운 동물들도 현실의 굴레 속에선 지킬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키고 싶던 동물들도 그들만의 공간과 함께 좌절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혜는 도망갔던 오리 '희선'을 서희가 몰래 구조해 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아이들은 희선이라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이 4명의 이야기는 한국의 사회구조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듯하다. 풍자적이고 은유적이다. 처음엔 이상하게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고자 하는 인혜의 연애를 통한 권력 획득욕, 생존 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칼을 차고 다니던 서희,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를 쉬었다가 외딴 섬이 되어버린 수민,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나 늘 따돌림을 받던 정애의 캐릭터 설정은 어쩌면 도식적이고 폭력적으로 보일 수는 설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방향을 찾지 못하고 거칠게 유랑하던 4명의 아이들이 연대하고, 희선이를 구조하는 은유적 스토리를 보았을 때, 풍자적 스토리라면 가능할 법하기도 한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성장하고 또 단단하게 홀로 서기를 하였다. 인혜는 반장이 되고 싶었던 꿈을 자신이 만든 모임 <산양들>의 대표가 되며 이루었고, 수민은 엄마에게서 한 발자국 독립하였고, 정애도 자신의 친모에 대한 그리움에서 한 발자국 벗어났다. 칼을 차고 다니며 가장 괴짜스러웠던 서희가 입시에 성공한 것이 약간 미스테리이긴 하지만 뭐,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선생님이 정의했듯이 "특별하지도 않은 것들이 혹시나 특별한 줄 알고 나대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를 증명해낸다. 사실 뭐 증명해낼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특별한 건 감출 수 없는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