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입시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 네 명이 선생님께 호출을 받는다. 전교에서 유일하게 진학조사서에 백지를 낸 탓이었고 그 벌로 네 명의 소녀들은 수시 합격을 목표로 특훈에 들어간다. 그러나 강제로 붙잡혔으니 집중이 될 리 없고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다. 학업을 강제하는 학교, 착한 아이로 남길 바라는 부모님, 대학교 이름에 ‘서울’만 붙으면 어디로든 보내고 싶어 하는 입시 체제 속에서 네 명은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찾아 나선다.
시작은 학교 사육장이었다. 인혜는 사육장의 동물들에게 너네가 먹고 싸는 것 외에 하는 일이 뭐냐며 타박하면서도 손수 조류독감 백신을 놓아주는데 그 손길은 다정하기만 하다. 곧이어 서희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내고 정애와는 자재를 조달한다. 마침내 수민이 합류하자 ‘산양들’이라는 그들만의 쉘터가 완성된다. 인혜가 ‘산양들’의 공간과 동물들에게 애착을 쏟는 이유는 분명하다. 줄곧 자신을 억누르던 선생님이나 부모님, 남자친구의 지시와 관리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한 결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혜뿐만이 아니라 서희와 정애, 수민에게도 마찬가지다. 소녀들만의 공간인 ‘산양들’은 네 명 외에는 그 어떤 어른도 관여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리더를 뽑고 역할을 분배하는 등 체계를 정립하며 유토피아를 가꾸어나간다.
그러던 중 인류에게는 반드시 재난이 닥친다고 말하며 생존법을 공부하던 서희의 경고는 현실이 되어버린다. 조류독감이 전파되어 다시금 수만 마리의 조류가 폐사당하며 소녀들을 위협한다. 그로 인해 학교 사육장은 폐쇄되고 ‘산양들’마저 철거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곳의 주인이자 유일한 주민이지만 무기력하게 어른들의 처사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학교조차도 학생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옴짝달짝할 수 없는 사육장에 가둬버린다.
<산양들> 속 어른들은 줄곧 소녀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만 그들을 단순히 ‘악역’이라 치부하기는 어렵다. 표면적으로는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권위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명분은 결국 소녀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가능성을 봉쇄하기에 급급하다. 소녀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각자의 성격이 어떻게 다른지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들이 갈 수 있는 대학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렇지만 어른들 역시 이 사회에서 이름 앞에 대학교 졸업장을 달지 못한 사람의 고단함을 알기 때문이라는 변명도 가능하다.
결국 <산양들>에 등장하는 어른들과 소녀들의 대립은 단순한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아니다. 영화는 어른들의 권위적인 태도조차도 일그러진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낸 구조적 관습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걸 깨달은 소녀들은 어른들의 기대를 벗어나 자신들만의 의지로 선택을 한다. 그러므로 소녀들이 찾고자 하는 유토피아는 단순히 대학 진학이나 어른들의 지시를 거부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뭐든 이루어 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소녀들과 동물들의 낙원이었던 ‘산양들’에서조차 겉돌던 희선이 마침내 날개짓을 성공한 순간,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유토피아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