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이 말은 왕왕 개개의 삶이 지닌 고달픔을 위로하는 말로 쓰여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라는 기나긴 역사의 파고를 넘고 또 넘어야 했던 이들은 나만 아픈 것이 아니고 남의 인생도 어차피 마찬가지라는 사실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애써 숨기며 살아왔다. 비극 앞에서 울지 못하고 묵묵히 버티는 것이 철든 삶이었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너 나 할 것 없이 아프다는 사람이 천지다. 도리어 아픔을 전시하고 비교하려는 시대이다. 나의 삶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나의 삶이 평안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서 괜히 심사가 뒤틀린다. 이 시대에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은 되려 인간을 철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이 말을 반복하며 겉보기에 몰랐던 타인의 삶이 지닌 곤궁함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만을 말한다. 오늘날은 소위 철없이 징징거리는 어른들의 시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들 무렵>의 이야기 방식은 무척 인상적이다. <철들 무렵>은 무거운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재주가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 역시 우리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영화 속 인물들이 봉착한 문제 또한 다양하다. 청년 실업 문제와 노인 빈곤 문제, 가족의 해체와 이로 인한 돌봄과 부양의 문제라는 한국 사회의 묵직한 고민들이 이 영화의 기저에는 깔려 있다. 하지만 이 문제들을 감독은 결코 무겁게만 다루지 않는다. 아버지 철택이 퇴원을 통지받자 딸 정미가 반색하고 이에 기분이 상한 철택이 정미와 논쟁하는 장면을 보자. 두 부녀는 서로에게 기분이 상한 이후 부녀 사이에서 해도 될 말과 안 될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이들의 대화에는 한국 사회에서 불거지고 있는 부모의 자녀 양육 문제와 자녀의 부모 봉양 문제가 가감없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 대화에서 사회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논쟁에 기어코 소동극으로서의 위트를 한 웅큼 집어넣는다. 우리는 모녀의 다툼에 눈치보다 뒤꽁무니를 빼는 의사와 간호사의 줄행랑에 도저히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는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관객 앞에 제시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한국 사회가 겪어온 역사의 파고는 생생한 아카이브 영상물로 제시하고,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각 인물들의 행태에 직설적으로 실어 제시한다. 하지만 이 문제 제기의 앞뒤로 영화는 유머를 결코 빼놓지 않는다. 영화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에 결코 죽자고 달려들지 않는다. 일단 웃기고 본다.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이 위트는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관객으로 하여금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가 된다. 암 선고 이후 딸의 걱정을 잔소리로 받아들여 그만하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잠적한 철택이 다시금 집 문을 열게 되는 것도 본인의 연기 역량을 십분 발휘한 정미의 짤막한 콩트 덕분이었다. 관객 역시 위트로 감싸진 영화의 문제 제기에 네가 뭘 알아 혹은 너만 힘드냐는 식의 반응을 하기 힘들다. 관객 역시 웃음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 일단 웃음이 터진 관객은 영화의 문제 제기를 한껏 누그러진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모두가 힘든 세상이다. 그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아우성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공론적 탐구로 이어지지 못하고 고통을 개인화한다. 어쩌면 유머를 겸비한 영화의 이런 태도는 각자의 고통만이 아우성치는 이 시대에 나만 아프다는 식의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우리 모두 아프다는 관점의 전환을 이끌어 낼 하나의 물꼬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영화의 만듦새를 보면서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기도 하다. 아무리 팍팍한 삶이더라도 거기에는 돌이켜보거나 멀리서 보았을 때, 한숨 돌릴 요소 혹은 웃을 요소가 하나쯤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웃고 보자. 어쩌면 이제는 많이 웃어야 철이 드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