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족히 수백 장은 되어 보이는 산더미 같은 종이 더미는 곧 소각을 앞두고 있다. 그 속에서 정확한 목적지가 적힌 편지 한 장을 발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했던가.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편지는 가야 할 사람에게 도착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를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붉은 문으로 인도한다.
초임 검사 코르네프의 손에 들어간 편지는 1937년의 소련에도 양심과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 살아 있음을 알리지만 코르네프가 편지의 발신인을 만나러 가기까지의 여정은 길고 고요하다. 굳게 닫힌 교도소의 붉은 문도 그의 신분증만 있으면 가지 못할 곳이 없고 누구도 코르네프의 앞을 막아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막아서는 이가 없다고 해서 반기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교도소의 시간은 코르네프에게 가혹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갓 부임해 사명감이 투철한 검사마저도 흐트러지게 만들고 곳곳에서 마주치는 간수들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코르네프가 받은 편지 한 장은 막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침묵 속을 걷고 기다림이 어떻게 지배와 권력의 도구로 쓰이는지를 목도한다. 붉은 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은 직접적으로 목을 죄어오지 않는다. 끝없는 대기와 침묵으로 코르네프를 압박하고 절차라는 허울 좋은 핑계는 그를 이곳에서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그 억압을 전부 견뎌낸 코르네프는 기어이 편지의 주인 스테프냐크를 만나러 간다. 묵직한 열쇠 뭉치가 시종일관 짤랑거리며 닫힌 문을 천천히 여는데 이것들은 전부 코르네프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열리지 않았을 문들이다.
<두 검사>는 이 과정을 아주 느린 호흡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지켜볼 뿐이다. 교도소 안의 색은 모두 죽어 생기를 잃어버린 것들만 남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코르네프의 시간을 함께 체험하게 된다. 스테프냐크의 경고와는 달리 영화 속에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붉은 문이 열렸다가 닫힌 순간 우리는 영원히 그 시간 속에 갇혀버리고 만다.
영화는 시작에서 시간 배경을 정확히 명시했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그리고 권력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낯설지 않다. <두 검사>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그 현실을 응시하며 관객을 위로하지도 않고 희망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암울한 복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건조한 유머와 풍자적인 리듬, 뜬구름을 잡는 듯한 대화들이 체제의 무능과 광기를 우스꽝스럽게 드러낸다. 종일 무겁게 나아가던 서사의 흐름을 잠시 비트는 이 리듬은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서민들의 생명력을 드러내며 이야기의 균형을 잡는다.
영화의 후반, 이어지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 온다. 코르네프는 오늘을 부르는 노래 속에서 단잠에 빠진다. 그 장면은 기다림의 시간과 다르게 매우 짧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건 1937년의 소련에도 스테프냐크가 있었고 코르네프가 있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