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 비전
두 분 부모님을 떠나보낸 후 깨달은 점 하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상실감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움은 더 깊어진다. 옛 집의 현관문을 열 때면 혹시나 보고 싶은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나오지 않을까 기대감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불 꺼진 방 한 곁에는 자그마한 두 실루엣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남은 평생이 애도 기간 아닐까 생각을 하고는 한다. <단잠>은 커다란 상실을 겪고 끝나지 않는 애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모녀를 섬세하고도 절제된 화면으로 보여준다.
엄마와 딸은 아버지의 장례 후 3년 정도가 지났음에도 아직 유골함을 집에 둔 상태이다. 주변 사람들은 유골을 봉안당에 안치하자고 권하지만 모녀는 남편이자 아빠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한다. <단잠>은 엄마와 딸의 애도가 다른 점에 주목하며 이 둘의 갈등에서 사회적인 손길이 필요하고 책임 또한 있음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 애도는 장례식장이나 납골당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도시의 거리에서 공원에서 또 해변과 같은 모든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감정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엄마와 딸은 각자 남편이자 아빠를 만났던 도시의 공간에 서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떠난 남자를 추모한다. 카메라는 현재의 거리와 기억 속의 거리를 교차시키면서 두서없이 보여주는데 어떤 경우 과거 속 대화 장면이 아니라 마치 현재에 고인이 강림하여 대화를 나누는 듯 의도한다.
<단잠>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은 혼재되어 있다. 카메라는 두 여인을 따라다니며 각자의 도시 공간에서 불현듯 출몰하는 유령을 포착한다. 엄마와 딸이 고인과 나누는 대화는 기억과 기대가 뒤섞여 있는데 이 둘이 겹치며 솟아오르는 감정은 아마 후회 아니겠는가. 떠난 이를 떠올리며 후회스럽지 않은 일이 없겠지만 특히 두 여인의 남자는 작별이 갑작스러운 데다 비극적이었던 탓에, 일상에 커다란 여파가 미쳐도 애끓는 상실감을 달래기 더욱 어려웠으리라.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사람은 이 둘뿐만이 아니다. 커다란 어려움에 처한 모녀에게 주변의 손길은 생각보다 호의적이지도 않고 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웃이나 친척들은 이들 앞에서 조심스러워하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자신들의 공간이나 영역에 애도 행위가 틈입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단잠>에서 유족들의 애도가 도시 공간 전체를 필요로 함에도 주변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유족들의 공간에 함께 가두려 한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의 시도에 대해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어'라는 말로 한탄하며 심경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회의 압력에 순응하며 점점 고립되어 간다. 영화 후반부에 이 여인이 집의 마당에 표정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카메라는 집의 울타리에 둘러싸인 구도로 함께 잡는다. 그녀는 꼼짝없이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여인에게 돌파구가 없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반면에 딸은 주변 사람들의 시도에 강하게 저항한다. 아빠의 공간을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당찬 딸은 주변의 침입과 통제를 현관문에서 원천 차단한다. <단잠>은 현관문으로 침입한 이웃을 쫓아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허용하는 엄마와 현관문에서 쫓아내는 딸을 대비시킴으로써 이 둘이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단잠>에서 죽은 자의 거주지는 무덤이나 저승이 아니라 산 자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고인들을 쫓아내면 산 자들 또한 살아갈 수 없다. 상실감은 이 공간에 스며있고 죽은 자들은 곧 내 일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상실을 겪고 애도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움과 후회, 상실감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한 이와 지속하는 혹은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새로운 관계 방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