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종종, 흔히들 주목할 만한 곳에서 빗겨나간 지점에 시선을 두곤 한다. 그의 전작 <쇼잉 업>(2025)이 하나의 예술을 빚어내기 위한 ‘이전’을 보여줬다면, 신작 <마스터마인드>는 그 완성품을 훔친 ‘이후’를 따라가기로 한다. 영화는 한 남자, 제임스(조쉬 오코너)가 그림 절도를 저지른 뒤 그의 삶에 남겨진 여파를 조용히 지켜본다. <마스터마인드>는 절도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삼으면서도 장르에 대한 기대에서 슬그머니 멀어진다. 그렇다면 빗나간 곳에서 영화가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스트 영화의 매력 중 하나가 전개를 속도감 있게 비추는 방식이라면, <마스터마인드>는 매정하게 느껴질 만큼 일관적으로 제임스의 절도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 편이다. 잘게 쪼갠 컷 편집도, 화려한 앵글도, 긴장감 넘치는 음악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 영화 안에서 제임스와 일행은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관조적인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은 자루에 모서리를 맞추고, 손잡이를 돌리며, 어깨에 짊어진 버거운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그런 제임스 일행의 노력을 지켜보자면 이내 우리의 입에선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데, 영화가 지워주지 않은 그들의 일분일초가 곧 이상과 현실의 괴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제임스가 꿈꾸는 비일상은 자주 일상과 뒤섞인다. 영화의 오프닝, 제임스가 조각을 훔치는 미술관의 내부에는 그의 가족이 있다. 그가 진열장을 숨죽여 여는 공간은 쉼 없이 조잘거리는 아들의 목소리가 혼재된 곳이기도 하다. 절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때, 돌연 차에서 토사물이 쏟아지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꿰맨 천이 계획의 준비물이 되고, 스타킹이 복면이 된다. 이처럼 영화는 반복적으로 비일상적 행위와 인물들이 불러오는 일상성 사이에 공간과 사물을 밀어 넣고 경계를 흩트린다. 나아가 단일한 공간이 범죄를 모의하는 현장과 안식처 사이를 오가며 뒤집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는 대상을 정의하는 ‘관념’의 허술함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두 종류의 허술함을 떠올릴 수 있다. 먼저 제임스다. 오프닝에서 조각을 손에 넣은 그는 가족과 함께 미술관을 나서다 문득 신발 끈을 고쳐 맨다. 기척 없이 빠져나가도 부족할 판에 얼굴을 드러내는 허술한 도둑의 눈앞으로 유리문이 닫힌다. 문 너머로 멀어지는 나머지 가족은 마치 조금 전 그가 앞에 두고 있던 진열장 속 조각처럼 보인다. 다른 하나는 경관들이다. 작품을 지켜야 할 그들은 두 차례의 절도가 이뤄지는 내내 졸고 있거나, 잃을 것이 눈에 보일 때에야 절박해진다.
그들의 공통점은 '왜'와 '어떻게'에 대한 사유를 상실한 채 기능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추상의 영역에 가치를 매기는 일과 비슷하다. 정확한 수치로 가늠할 도리는 없지만, 그것에 상당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믿음 아래에서 이루어지듯이. 그리고 이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내에게 호소하는 제임스의 궤변을 이해할 단서이자, 서늘한 엔딩 시퀀스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의문이 누락된 상태에서 그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관성적인 행위뿐이다. 이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전언만으로 형형히 남는다. 설령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할지라도. <마스터마인드>의 엔딩은 이러한 비척거림이 휩쓸고 간 자리를 고요히 응시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