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평론단
어느 여름날, 한 장의 포스터 앞에 멈춰 섰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이름, 이병헌. 그리고 이어서, 손예진. 모처럼 큰 영화가 하나 나오는 건가 생각하는 찰나에 바로 그다음 이름들이 마저 눈에 들어온다. 박휘순, 이성민, 염혜란, 그리고 차승원까지.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이 모든 배우를 한 작품에 캐스팅하는 게 어떻게 가능해? 그리고 마지막 이름이 모든 걸 설명한다. 감독 박찬욱. 여름 내내 무더위는 끝날 줄 몰랐다.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궁금함도 그만큼 진하게 쌓였다. 해고와 실업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박찬욱 감독 특유의 잔혹하게 아름다운 미장센과 감성 짙은 테마가 더해지면 어떠한 색깔의 영화가 나올까. 계절의 막바지에 베니스에서 전해지는 찬사들은 더 기대감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가을이 왔다.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주인공 유만수(이병헌)는 그야말로 풍요와 결실의 계절을 만끽한다. 아름다운 내 집, 푸르른 정원에, 바비큐 그릴에는 회사로부터 선물 받은 장어가 구워지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리트리버 두 마리까지 더 바랄 것 없이 모두 이뤘다는 가슴 벅찬 만족감이 가득하다. 그러나 가을은 전환의 시기이다. 계절의 절정을 지나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만수의 완벽한 행복도 변곡점을 지난다. 과거의 영광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교차한다. 갑작스럽게 구조조정으로 인한 해고 통지가 날아들고 싸늘한 재취업 시장으로 내몰린다. 중년에 접어든 만수에게 갑작스러운 실직은 곧 존재의 위기다. 가족의 풍요로운 일상을 책임져 온 가장으로서의 권위, 한때 올해의 펄프맨에 빛나는 제지 기술자로서의 명예, 인정받는 남자로서 자존심이 차례로 무너진다. 3개월이면 가능할 줄 알았던 재취업은 일 년을 훌쩍 넘기며 다시 차가운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만수는 동일 업계 경쟁자들을 직접 찾아 제거해 버리기로 결심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 숲길의 정취가 프레임 가득 밀도 있게 담긴다. 한편으로 바짝 말라가는 앙상한 가지가 또 다른 가을의 질감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사계절 푸르른 분재들로 가득한 온실이 등장하며 자연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난 환상적이고 내밀한 공간으로 대비되기도 한다. 쇠락하는 계절인 가을 모티브는 시간적 배경일뿐만 아니라 여러 서사 층위에서 낙엽처럼 겹겹이 쌓인다. 실직으로 위기에 몰린 유만수의 개인 서사 위에 불신과 불통으로 해체되는 가족 서사가 있다. 또 한 겹을 들춰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쇠퇴하게 되는 제지 산업 서사가 흐른다. 이 서사 층위들이 단순히 병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반향한다. 주인공의 선택은 가족의 불신을 심화시키고, 가족의 균열은 곧 산업 구조에 대한 무력감을 부각하며, 그 모든 과정이 도덕적 체념으로 귀결된다. 이 반복과 변주의 리듬은 영화 곳곳에서 동일한 대사가 미묘하게 비틀려 재등장하는 방식으로도 드러난다.
궁지에 몰린 인물이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이야기는 잔혹한 스릴러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박찬욱 감독은 블랙 코미디를 선택했다. ‘쟤만 사라지면 내가 1등이 될 텐데’하는 만년 2등의 농담을 정말로 농담인 듯 웃음을 얹어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명배우들의 호연이 평범한 이웃 같으면서도 어딘가 살짝씩 기묘한 인물들이 자아내는 기묘한 유머를 빛나게 한다. 또한 조용필의 80년대 가요 ‘고추잠자리’의 볼륨을 한껏 높여서 처절함과 절박한 비명을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로 가뿐하게 덮어버린다. 미성숙과 불안에 대한 가사가 경쾌한 멜로디가 이루는 아이러니가 또 한 번 급박하고 살벌한 상황을 역으로 부각한다. 비극을 유머로 희석하여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질량의 코미디로 꾹꾹 눌러버리는 느낌이라서 웃음이 터지다가도 새어 나오는 씁쓸한 연민과 처량한 공감이 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생각하는 대중 영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고용 불안이라는 소재의 보편성, 기술 발달로 인한 인간 소외 문제의 시의성, 무력감과 자기합리화가 복잡하게 섞인 ‘어쩔 수 없다’라는 변명이 주는 미묘한 불편함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든 공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이 가볍게 웃으며 따라갈 수 있는 ‘쉬운’ 이야기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만의 예술적 집착과 감각적 실험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의외로 현실적이면서도 역시나 이상하고, 박찬욱치곤 담백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박찬욱의 영화다. 여름의 포스터 앞에서 영글었던 설렘이 한 계절 동안 익어서, 이제 가을 수확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맛으로 다가올지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