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흥행에 참패하자 제작자는 도망가고, 빚을 떠안게 된 감독 만수에게 조직폭력배인 사채업자가 빚을 탕감해 주는 대신 치매에 걸린 자신의 아버지의 평생 소원을 들어달라는 부탁 같은 협박을 한다. 아버지의 고향 개마고원 비슷한 모양의 세트를 만들어 거짓으로라도 고향을 방문하는 것처럼 꾸며달라는 것. 만수는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승낙하게 되고 사채업자는 자신의 오른팔 성철을 이 기상천외한 프로젝트에 붙여놓는다. 그러나 노인을 속여넘기기가 쉽지 않다. 버림받은 자들의 목적지 없는 여정을 그린 로드무비 <세상 밖으로>로 데뷔한 이래, 여균동은 다양한 경향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의 신작 <비단구두>는 데뷔작의 거칠고 싱싱한 에너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구차하게 살아가는 영화 감독 만수의 모습에는 어쩔 수 없는 여균동의 자기 연민이 배어있고, 고향을 떠나온 노인의 치매증은 동시대 한국인의 뿌리깊은 상실감을 환기시킨다. 영화는 분단의 상실감을 위로할 수 있을까, 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시종 유쾌한 유머를 선사하는 신선한 블랙코미디. 허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