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인도 말라 왕국의 왕과 왕비는 어느 날 원로회로부터 난처한 ′명령′을 전달받는다. 왕이 성불능으로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다른 남자의 씨로 왕비에게 자손을 낳으라는 것이다. ′니요가′라 불리는 이 전통은 제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였다. 아니, 왕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아나핫>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왕과 왕비의 내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사회적 의무와 개인적인 감정간의 충돌이 일으키는 파장을 여러 겹으로 펼쳐 놓았다. 여기에는 질투심, 배신감, 분노, 혼란 등 예상할 수 있는 감정들이 층층이 쌓여 있지만 의외의 것도 숨겨져 있다. 섹스 없이도 완전해 보이던 그들의 사랑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각이 끼어든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온전히 방향을 틀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 대신 ′영원′ (아나핫)한 것에 손을 들어 주며 영화는 안전한 결말로 다시 급선회하는 방식을 택한다. 아몰 팔레카 감독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인 <아나핫>은 관능적인 이미지로 주제를 먼저 ′보여준다′. 그것은 카메라를 침대에 들이대는 방식이 아니다. 갈등하는 인물들을 껴안듯 움직이는 카메라와 고대 왕궁을 재현한 화려한 세트, 그리고 화면 가득한 붉은 색감이 어울어져 빚어낸 시각적 쾌락이 이 영화의 주제를 감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리우드의 산업적인 틀 바깥에서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아나핫>에서 인도영화의 새로운 표정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강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