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세번째 영화에는 색채가 빠져있다. 컬러가 지닌 많은 정보량이 인물들의 감정선을 무디게 할 우려가 있다는것이 감독이 밝히는 이유이다. 그 정도로 이 흑백영화는 시종 남자와 여자의 감정의 섬세한 차이를 건드려 간다. 수정은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의 구성작가이다. 그녀는 같은 프로그램 담당 PD인 영수와 가까운 사이이다. 영수는 영화 제작의 도움을 받고자 수정과 함께 돈 많은 후배 재훈의 갤러리에 들른다. 함께 술자리를 하는 도중 재훈은 수정에게 관심을 보인다. 어는 날 재훈은 인사동 골목에서 수정에게 키스하고 연애가 시작된다. 그러나 섹스를 시도하는 순간 재훈은 수정이 처녀임을 알고 감격하며 섹스를 포기한다. 영화는 형식상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에피소드들은 각기 남자와 여자의 기억에 따라 반복되고 변주된다. 그 기억은 두 사람이 몸을 합치는 사랑의 행위에서까지도 차이를 만든다. 인간도 삶도 모두 일면적일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화면에 보이는 남산 케이블카, 배드민턴 놀이 같은 서울 풍경까지 낯설게 느껴진다. 과연 관객의 기억은 얼마만큼 신뢰할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감독의 기억은? (한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