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한 공간에서 사랑하고, 잊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할까? 감독은 작은 이야기를 아주 낯선 기법으로 풀어 놓는다. 아무런 이유 없이 중국으로 떠나고자 하는 일 중독증 킬러가 있다. 그녀가 묵는 모텔에 사는 만화가는 킬러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그는 기억을 망각케 하는 약물을 먹인다. 그러나 기억이 사라진 그녀는 이미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를 떠나 보낸 만화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그녀는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이 작품을 보는 것은 일상화된 영화 경험에 도전을 준다. SF, 멜로 드라마 등의 여러 관습을 빌어오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장르의 관습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기억과 이미지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기 대문이다. 사랑과 죽음의 게임을 통해 기억의 문제를 논하는 기법은 한국 영화의 새로운 시도이며, 여성 특유의 감성이 돋보인다. 어쩌면 국적 없다고 비판받을지 모를 감독의 상상력은 ′사적영화′의 전통이 부재한 이 땅에서 독특한 이정표를 세운다. 과감한 색채의 사용, 그리고 잦은 필터의 교체와 실험적인 필름의 효과 등은 다른 극영화가 미처 시도해 보지 못했던 경험의 영역이며 매체의 실험이다.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말을 빌자면, 없은 여성감독의 이러한 시도가 매력적인 까닭은 아직 "거세되지 않은 자유분방함" 때문이다. (이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