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을 펼쳐 낡은 흑백사진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세월 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롤랑 바르트는 기다림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로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으로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 하(夏): 세 청년이 폐교로 찾아온다.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 중이다. 처음에는 뭔가 은밀하고 사회와 격리된 이곳이 좋았지만 하루하루가 무료해진다. 사소한 이유로 다투기도 하다가, 성격의 차이를 참지 못해 결국 창도만 남고 모두 떠나간다. 우(雨): 주경, 다정, 송연은 이 폐교의 졸업생들이다. 남자동창의 죽음을 맞아 모처럼 모인 여동창들은 추억이 담긴 낡은 교정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들은 과거의 꿈을 회상하고 작은 술자리를 벌이기도 한다. 칠판에 낙서를 남기고 그들은 돌아선다. 등(登): 시간이 흘러 주경은 폐교를 다시 찾는다. 아무도 없을 것만 같던 이곳에서 한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다. 창도는 차를 나눈 후 주경에게 친구가 만들었던 ‘등’을 선물한다.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사소한 인과율만으로 연결되며,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성으로 다가온다. 교정 내부를 조망하는 사물에 대한 엄밀함과 빛으로 대변되는 분위기의 묘사는 차분히 우리의 호흡을 가다듬는다. 방황과 추억이라는 젊음의 두가지 요소를 단아한 양식으로 그려놓은 아름다운 작품이다.(이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