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전체메뉴

친절한 프로그래머

그 푸른 청춘들
영화이미지

© 서승희

추석날 오후, 해운대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하늘은 높아 파랬고 뭉게구름은 선명했습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평화롭게 해변을 거닐고 있었고, 모래사장에는 한 무리 소년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소년들이었습니다. ‘열여섯? 열일곱? 이런 시기에 어떻게 한국에 온 걸까?’ 환히 웃으며 뛰는 소년들을 축대에 앉아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좁고 미끈한 소년들의 등판이 가을볕 아래 물고기처럼 반짝거렸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소년들은 총총 사라졌고, 결말을 짓지 않은 단편영화가 끝난 것 같이 아쉬웠습니다. 짧은 지면에 담길 많은 영화를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하던 차에, 청소년이 주인공이거나 청춘을 다룬 영화들 중심으로 쓰기로 합니다.
영화이미지

<눈물의 소금> 필립 가렐

청춘,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으로 인한 고통은 필립 가렐 감독의 영원한 테마입니다. 흑백영화 <눈물의 소금>에서 감독은 소녀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시골 청년 뤽의 여정을 좇습니다. 일흔이 넘은 거장은 그 어떤 인물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사랑을 앓는 청춘들의 초상화를 물 흐르듯 그려냅니다.
영화이미지

<가가린> 파니 리에타르, 제레미 투루일

<가가린>은 작년에 소개했던 <레미제라블>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입니다. ‘가가린’은 1963년에 건립돼 2019년에 철거된,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지은 파리 외곽의 도시입니다. 파니 리에타르 감독과 제레미 투루일 감독은 철거 직전의 이 도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내면서 <가가린>을 한 편의 시로 승화시킵니다. 주택단지 곳곳을 우주인처럼 부유하던 열여섯 소년 유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영화이미지

<열여섯 봄> 수잔 랭동

올해로 스무 살인 수잔 랭동 감독은 첫 장편 <열여섯 봄>에서 직접 주인공으로 열연합니다.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열여섯에 출연한 클로드 밀러 감독의 <귀여운 여도적>(1988)처럼 그야말로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작품입니다. 스무 살 감독의 재기 발랄한 상상력은 이 사춘기 연대기를 영화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뮤지컬로 전환합니다.
영화이미지

<썸머 85> 프랑수아 오종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에이단 체임버스의 소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1982)에 자전적인 요소를 가미해 감동적인 틴무비 <썸머 85>를 완성했습니다. 1985년에 발표된 팝송 ‘인 비트윈 데이즈(In between days)’를 영화에 삽입하기 위해 <썸머 84>라는 본래 제목을 바꾸었을 정도로 영화에서 음악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영화이미지

<테디> 뤼도빅 부케르마, 조란 부케르마

베를린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안토니 바종은 <테디>에서 비루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외로운 한 청년을 비유하는 늑대 인간으로, <또 하나의 전쟁>에서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다 지쳐 쓰러지는 신병 레오 역으로 분합니다. <왕들의 그날 밤>을 연출한 필립 라코트는, 생존을 위해 수감자들을 상대로 밤새 재미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줘야 하는 열일곱 살 소년을 통해 코트디부아르의 정치적 상황을 직시합니다.
영화이미지

<이브라힘> 사미르 게스미

청춘은 참 당당하기도 해서, 우리의 열혈 청년 주인공들은 생의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부딪치고 또 부딪칩니다. 사랑을 잃은 소년은 무덤 위에서 춤을 추고(썸머 85), 열다섯의 스키 선수 리즈는 코치와의 불합리한 사랑을 경험한 후 홀로서기를 선언합니다(슬라롬). 법학과 1학년인 루이자는 정치적인 신념을 위한 폭력이 용인될 수 있는지를 자문합니다(내일은 세상). 가난한 고등학생 이브라힘은 아버지의 틀니를 얻기 위해 치과의사를 찾아가 울먹입니다(이브라힘). 아홉 살 난 아이가 소통이 불가한 세상에 홀로 남았을 때, 짐승처럼 포효한다는 슬픈 진실을 <라이벌>을 본 후에야 알았습니다.

해운대에서 마주친 축구소년들이 멀리 부산까지 찾아온 것처럼, 그 푸른 우리의 주인공들과 감독들을 관객과 함께 무사히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월드 프로그래머 서승희

By 월드 프로그래머 서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