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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태(송재룡)는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그에게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남자는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살아간다.<밤빛>은 조용한 영화이다. 한겨울 깊은 산속에서 생활하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추는 동안 들리는 소리는 약간의 생활 소음과 자연의 소리뿐이다. 얼음을 깨서 페트병에 물을 담고, 고드름을 따서 수분을 보충하며, 절벽에 매달려 버섯을 채취하는 그의 모습은 얼핏 장인 정신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그의 행동에서 숭고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희태가 아무 말 없이, 심지어는 별다른 표정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남은 삶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전파도, 전기도 없는 산속에서 다가오는 마지막을 기다리던 희태에게 아들 민상(지대한)이 찾아온다. 아들은 태어나서 처음 만난 듯한 희태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하지만 희태는 아저씨라는 단어를 정정해 주지 않는다. 불쾌함도 느끼지 않는다. 아들과 자신의 먼 마음의 거리를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공유하며 함께 지낸다.달빛만 존재하는 저녁. 민상은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깜깜한 천장에는 야광 별만이 약하게 빛나고 있다. 왜 붙여두었냐는 민상의 물음에 희태가 대답한다.두려움이 다가올 때 그 별을 바라본다고. <밤빛>은 불친절하다. 부자의 이름도 나오지 않으며, 아들이 왜 아버지를 찾아왔는지 자세한 설명도 없다. 하지만 <밤빛>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유를 하게 한다.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하여.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다만 그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찾아오느냐, 혹은 급작스럽게 오느냐, 아프게 다가오느냐, 혹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다가오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게 온다고 하여도, 스스로 예상한 시기에 온다고 하여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잊혀질 존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죽음 그 너머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은 쉽게 떨치기 힘든 감정이다.  <밤빛>은 내가 맞이하고 싶었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남은 시간을 의연하게 견뎌내는 하루하루. 그래도 불현듯, 내 의지와는 다르게 찾아오는 두려움을 우린 어떻게 버티고, 견뎌내기 위해 심호흡할 것인가. 영화에서 희태가 바라보는 밤빛은 그런 두려움을 승화시킬 수 있는 구원과도 같다. 내가 두렵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끝을 향해 걸어가는 것. 이 방법보다 더 빛나는 방법이 있을까. 

2018.10.28
박소연

<밤빛>의 주인공은 빛이다. <밤빛>은 사물이 환한 낮 속에서 제 형체를 분명히 할 때도 어두운 밤 속에서 숨어 있을 때도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확인받는 것은 언제나 빛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밝은 낮 속에서 어둠을 멀리하며 빛을 연장시켜가며 살아가는 인생을 지향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오히려 빛의 부재, 어둠 속에서 희미한 자신을 움직이는 어떤 몸짓을 사랑하는 영화다. 남자(송재룡)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산 속에서 살아가며 미래가 없다. 그런 남자에게 한 아이(지대한)가 찾아온다.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지만 남자의 아들이다. 영화는 아들이 남자가 사는 집으로 찾아온 2박 3일간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혈연관계로 맺어진 관계성을 회복하는 상투적인 가족극을 상상하게 되겠지만 이 영화는 사실 빛과 어둠의 관계 또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남자는 산 속에서 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전기가 없는, 그래서 어둠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어둠이 마냥 좋지는 않다. 어둠이 무서워 야광별을 붙여놓았고 새벽에 깨어나 손전등을 의지한 채 햇빛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곤 한다. 환하게 불을 밝힐 수도 없는 그렇다고 어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남자는 박제된 야광별처럼 꼼짝없는 신세였다. 그런 그의 밤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빛의 부재 속에서 살아오던 남자가 캄캄한 밤에 촛불을 조용히 밝히고 누군가를 쓰다듬는 일은 이 인물에게 여태껏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어둠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어둠을 조금 몰아내고 존재를 확인하는 몸짓은 그가 어둠 속에서 불안해하며 갈구했던 죽음 이후의 어떤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몸짓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산에 정상에 오른 남자의 얼굴을 가느다랗게 비추는 밤하늘의 찬란한 빛으로 완결된다. 그 빛은 집 천장에 박제된 야광별처럼 죽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낮 다음에 밤이 오는 삶 뒤에 죽음이 와서 그대로 굳어버리는 무(無)로의 끝없는 걸음이 아니라 밤뒤에도 낮이 오고 죽음 뒤에도 삶이 있는 순환적인 걸음을 <밤빛>은 보여준다.

2018.10.22
이제열

 <영주>라는 영화는 순간의 사고로 한 순간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남동생과 단 둘이 이 세상에 남겨진 한 소녀의 이름이다. 그 소녀에게 닥친 현실이란 어떤 것일까? 부모가 남긴 대출 빚, 부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에게 받은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의 합의금, 네 가족이 단란하게 살던 낡은 집을 파는 것이 낫다는 고모의 협박 같은 말이 한국의 지극히 인정받는 현실일까?  그렇다면 영화의 초반은 현실을 잘 표방해 낸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피붙이 남동생은 방황하고 폭행사고에 휘말려 얼른 합의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소년원에 보낼 수 밖에 없다. 고모에게 찾아가 봤지만 차가운 말밖에 돌아오지 않고,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장본인인 부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를 찾아가는 것 뿐이다.  시장에서 두부장사를 하는 가해자를 찾아가 그녀는 그 곳에 취직을 한다.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아들을 둔 그 부부는 자신들의 가게에 취직한 그녀를 진심으로 아낀다. 친척인 고모조차도 사리사욕에 취해 그녀를 모질게만 대했는데도 두부가게 안주인은 알뜰살뜰히 챙겨준다. 비현실적이게도 말이다.  차디찬 무관심과 냉대만이 현실적인 걸까? 자신의 이익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해도 따뜻한 정을 나누는 것은 비현실적인 걸까? 세상을 단순화하고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아온 건 아닌가 의문해본다.  꿈을 꾼 것처럼, 동화 속 이야기처럼 불안하지만 행복한 한 때를 보낸 영주는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 어쩌면 내가 현실이라고 인지하는 세상 속으로 떨어진다. 그 때 그녀가 느낀 감정과 그런 감정들을 겪고 그 이후 그녀가 행하는 행동의 변화로 이런 현실 속에서도 미약하나마 희망을 이야기해 본다.

2018.10.21
변숙희

                                                          <나는 보리> 나는 눈으로 듣는다!  초등학생 보리(김아송)는 엄마, 아빠, 남동생이 청각장애인인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소리를 듣고 말을 할 수 있다. 자라면서 어깨 너머로 자연스레 익힌 수화 덕분에 가족들과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나 식구들이 수화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식탁에서는 소외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가족들이 보리를 따돌리는 것고 아니고 부모의 따뜻한 애정과 관심 속에 살지만 자신만 가족과 다르다고 느낀다. 식구들을 닮고 싶은 보리는 등교길에 성황당 앞에 멈춰 소리를 잃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 친구에게 빌린 MP3 볼륨을 최대한 올려 들기도 한다. 우연히 TV를 보던 중 해녀가 수중에 오래 있다보면 귀가 잘 안들린다는 말은 들은 보리는 소리를 잃고 싶다는 간절함에 어느 날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든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여주는 만큼, 대사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자막으로 처리됐다. 하지만 번역어를 읽는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보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단어 나열로 이뤄졌다. 비록 완벽한 문장은 아니나 관객들이 이해를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보리의 입장에서 그냥 내러티브를 따라 가기만 하면된다. 김진유 감독은  제목 속의 보리가 보다라는 순수 우리말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즉, 보리가 가족과 소통할 때 듣기는 청각이 아니라 수화를 읽어내는 시각이다.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장애인 가족을 내러티브의 중심에 두었으나 흔히 우리가 접하는 전형적인 내용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을 자아내려 하지 않는다. 비록 장애라는 불편함은 있으나 여느 화목한 가정과 차이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역시 기적이 일어나는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이 아니라 있는 그 동안 행복하게 살아 왔던 삶의 리듬이 계속 되는 방법으로 정리한다.

2018.10.14
강혜구

자멸의 미학- <멀리가지마라> in 2018 BIFF 시민평론단 함윤정  박현용의 장편 <멀리가지 마라>는 매우 연극적인 영화다. 1막 부터 4막까지 의도적으로 나누어진 이야기와 한정된 실내 공간, 인물을 벗어나서는 좀처럼 비추어지지 않는 조명, 배우들의 대사마저 이것이 연극이라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에 두고 유산 정리를 위해 자식들과 그들 각각의 배우자들이 첫째 아들의 집에 모인다. 이윽고 공증인은 아버지의 유서와 유산 배분에 관한 문서를 읊어준다.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9억, 둘째 3억, 셋째 3억, 넷째 3억, 그리고 교회에 2억을 기부한다는 것. 이에 대해 각자 불만을 제기하던 형제들의 언성이 높아질 때쯤, 전화 한 통이 울린다. 이는 다름아닌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20억을 요구하는 유괴범의 전화였고 그때부터 인물들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난 인물들, 그 속에서 얽히는 그들 각자의 욕망, 그러다 결국 상황을 초래한 자가 파국을 맞는 이야기. 사실 <멀리가지 마라>는 서사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그다지 새로운 영화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서사 대신에 이 영화가 취하는 형식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영화는 왜 연극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했는가? 또 그를 통해 마침내 이 영화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영화의 초반부터 살펴보자. ‘유산’과 ‘20억’이라는 제목의 1막과 2막이 진행될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이야기가 연극 무대 위가 아닌 영화관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서사가 딛고 나아가야하는 기본적인 배경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하는 장면에서, 누군가 열변을 토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힐 때마다 보여지는 각각의 쇼트들은 결코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오히려 모범적으로 보일 만큼 곧고 유연하다. 그러다 인물들이 하나 둘 거실을 벗어나 화장실, 방 등의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는 상황이 생기자 그때부터 영화는 나름대로 독특한 연출법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공간을 구획 짓는 불투명한 벽 대신 실제 카메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벽 너머의 공간을 투사해 표현한 이미지들이 그 자체로 ‘영화적’이라 불리기는 다소 힘들어 보인다. 이는 단지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펼쳐지는 연극의 특성을 최대한 충실하게 영상 안에 담아내려는 시도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극적인 것을 영화라는 틀 안에 옮겨 담아보려는 감독의 노력이 크게 무리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앞서 말했듯 연극이 갖고있는 ‘한정된 공간’이라는 한계가 오히려 연극만의 매력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영화로 끌어올 이유가 딱히 없어 보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어느새 3막에 이르러 ‘불청객’으로 표현되는 경찰이 등장하면서 부터 이 연극적인 영상들은 ‘영화’라는 이름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조금씩 흘러 넘치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플래쉬 백은 너무나도 손쉽게 뻔하디 뻔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 영화의 후반부인 4막에서 20억이 든 돈가방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가려는 이의 모습은 극영화의 주요 요소인 인물, 공간, 그리고 서사를 넘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도 멀리 떠나 보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한다. 이제 그 ‘멀리감’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질 뿐이다. 결국 실내에서 빠져나간 인물을 따라 이동한 카메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탈주하기 시작하는 인물을 비추며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처럼 영화가 연극적인 공간을 벗어나 비로소 진짜 ‘영화’처럼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스스로의 생명력을 잃고 그야말로 멀리 가버린다는 점이다. 서사 역시 뒤처질 틈 없이 걷잡을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렇게 맞게 된 마지막 장면에서 갈 때까지 가버린 상황을 뻔뻔할 정도로 오래 잡아내는 카메라는 마치 영화로서 그 자신의 죽음을 응시하는 듯 하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단순히 욕망 앞에서 멀리 사라져가는 가족애 또는 인간미를 그린 블랙코미디라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아 보인다. <멀리가지 마라>는 멀리 가버린 이야기를 다룬 영화인 동시에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자멸해버리는 광경을 전시하는, 파국적인 영화다.

2018.10.14
함윤정

한가람 감독의 영화 <아워 바디>를 몸에 관한 영화, 나아가 몸을 긍정하는 영화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이밍량의 영화 <너의 얼굴>이 얼굴에 관한 영화, 나아가 얼굴을 긍정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굳이 <아워 바디>를 몸에 관한 영화라고 말한다면, 이때의 몸은 육체성이 아니라 관능성으로 정의될 것이다. 영화는 몸의 관능성을 너무 많이 보여주는데 반해 몸의 육체성을 덜 보여주거나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지적은 한 영화의 결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결함조차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 영화를 몸이 아닌 욕망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나를 끌어당긴 하나의 쇼트에 대해서만 말하려 한다. 인턴 면접실에 31살의 자영(최희서)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하이 앵글의 롱숏. 자영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에 묵묵히 앉아 정면인지 허공인지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한다. 면접관들에게 인사는 하지 않는다. 쇼트가 바뀌면 자영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이상하게도 면접관들과 자영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아니 말을 하려는 어떤 의도도 없어 보인다. 침묵한 채 정면의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는 자영의 표정은 그 이상한 공기 속에서 얼마간 지속된다. 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자영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그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으로선 그 느낌의 이유를 설명할 문장을 찾지 못하겠다. 다만 영화의 후반까지 다만 암시될 뿐인 자영의 태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다. 현주(안지혜)가 죽자 자영은 현주의 흔적을 밟는 한편, 그 상실을 슬퍼하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직장을 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연락이 되지 않아 찾아온 직장 상사인 친구에게조차 냉담하게 반응한다. 현주의 죽음과 맞물려 자영은 얼마 몸담지 않았던 직장마저 그만두리라.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에서 자영은 인턴 면접을 기다리고 있고 영화는 그 사이의 변화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한 채 시선을 어딘가로 던지는 자영의 얼굴을 보여줄 뿐이다. 부자연스러운 서사 전개와 알 수 없지만 보는 이를 매혹하는 자영의 표정, 이 둘은 어디서 어떻게 겹쳐있는 것일까.

2018.10.14
김성원

<영하의바람>: 순간이 시간을 지배할 때   시계는 둥글다. 시계의 시간은 돌고, 또 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직선의 시간에 머문다. 선을 좌-악 그어 그 위에 점 세 개를 찍으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 일컬어지는 시간들이 생겨난다. 그 직선을 스쳐지나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과거는 잊혀 지기 마련이다. 그저 현재에 충실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로, 우리는 그렇게 여겨진다.     김유리 감독의 <영하의 바람>은 우리의 몸이 따르는 시간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12살, 15살 그리고 19살의 영하와 영하의 엄마, 새 아빠 그리고 미진을 만난다.     영하의 엄마는 이 영화에서 미래를 위해 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더 나은 가정환경을 만들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한다. 반면 새 아빠에게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시간을 담아냄과 동시에 새 아빠는 급격히 초라해져간다. 북유럽풍의 잠옷가운은 어느새 허름한 점퍼로 변해있었다. 스크린 너머로도 전해오는 술 냄새는 그에게서 어떤 희망도 느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영하. 과거 한 순간에 머물고 있는 영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영하는 12살, 절친 미진과 눈물로 이별하고 낯선 트럭에 몸을 실어야 했던 순간 그리고 이내 다시 돌아와야 했던 순간 그리고 갈 곳을 잃었던 순간. 자신의 몸이 짐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 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영하의 바람>은 12살 영하가 마지막으로 머물러 있던 곳에 15살 영하의 시선을 갖다 댐으로서 영하가 그 순간 속에 살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하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순간을 영화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영하의 주변인물 그 누구도 그 순간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설명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과거가 된 순간 하지만 여전히 그 순간을 살아가는 영하. <영하의 바람>은 그런 영하의 이야기다.     영화는 12살, 15살 그리고 19살 영하와 함께 미진도 비춘다. 시간의 흐름은 우리의 모습을 바꾸기 마련이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해가는 미진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 미진의 특징을 ‘뚱뚱한 소녀’로 설정한 듯하다. 미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마주한 인물을 뚱뚱함으로 특징지음으로서 영화는 많은 한계를 드러낸다.     “깃털….” 미진에 대한 영하의 애정 어린 표현이다. 영화는 뚱뚱한 미진을 이렇게 담아내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영화는 실패했다. 과자를 먹으며 걷고 있는 미진과 그 모습을 창문을 통해 보고 있는 영하. 캐디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미진과 ‘굵은’다리에서 시작하는 카메라 앵글 그리고 극장에서 들려왔던 관객들의 웃음소리. 높은 취업 문턱에서 어쩔 수 없이 ‘뽀샵’으로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가 아닌, 그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미진에게 초점을 맞춘 표현들. 차갑고 무거운 이 영화 속에서 미진의 몸은 쉽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영하의 바람>은 7년이라는 시간을 어색하지 않게 잘 담아냈다. 카메라가 다 마주할 수 없었던 시간들을 공간의 변화로 메워냈다. 각종 자수가 집안을 따뜻하게 만들었던 12살 영하의 집과는 달리 각종 비타민 상품이 가득 차 있던, 삭막하게만 느껴지던 19살 영하의 집. 그리고 급격하게 변해가는 공간들의 어색한 공기는 12살 영하의 순간으로 설득력을 가졌다.     피해자의 아픔은 과거의 것이 아니다. 실수‘였’다라는, 자신의 행위를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변명이 통해선 안 된다. 특정 순간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영하의 이야기를 담은 <영하의 바람>은 과거를 묻고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려고만 하는 사회가 다시금 ‘피해의 순간’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생각하게 했다. 다만 그 속에서 소비 된 미진의 존재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2018.10.14
문미진

<영주>(2017)의 주인공 영주(김향기)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영주는 남동생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다. 부모와의 추억이 남겨진 집은 재개발로 떠나야 할 판이고, 동생이 사고를 쳐서 보석금이 필요한데 돈을 구하려다 사기를 당한다. 영주는 부모를 사고에 이르게 한 원수의 집을 찾아간다. 트럭 운전사였던 가해자는 이제 부인과 함께 두부 가게를 하는 사장이 되어 있다. 영주가 사장을 만나 취업을 청할 때 긴장이 감돈다. 영주네 가족과 가해자는 재판까지 가는 관계였기 때문에 사장이 영주를 알아봐서 취업을 거절하거나, 알면서 영주를 취업시켰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영주는 더욱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고모의 말이지만 사장은 집행유예로 빠져나온 능력자다. 말수가 적고 음침해 보이는 사장의 모습은 장르적 변주를 상상하게 만든다. 사장의 집에는 의식이 없는 아들이 누워있다. 영주와 단둘이 있게 된 환자를 영주는 한참을 쳐다본다. 놀라움 속에 영주의 얼굴에 어떤 생각이 스치는 것 같다. 마침 사장이 나타나 그 긴장의 사슬을 끊지만. 게다가 사장 부인이 집에 가져가라고 주는 두부를 영주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럴 때 영주도 사장과 마찬가지로 장르적 변주에 동참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둘의 대결이 벌어질 영화의 장래는 아들이 누워 있는 어두컴컴한 방 안의 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이상하게도 사장의 부인은 영주를 너무 좋아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영주가 남편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다. 돈이 궁한 영주가 한밤에 가게로 돈을 훔치러 들어갔는데 때마침 술에 취한 사장이 들어와 쓰러진다. 사장은 심장이 안 좋았고 영주가 알려줘서 안전하게 구조되었다. 목숨의 은인에다가 영주 특유의 성실함과 사랑스러움(배우 김향기 아닌가)이 느껴졌겠지만, 부인이 영주를 애지중지하는 제일 큰 이유는 부인 자신의 결핍 때문일 것이다. 부인은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아들 대신 영주를 딸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장이 쓰러지는 바람에 영주의 미션이 실패했지만 사장 부인은 영주가 동생을 석방시키기 위해 필요한 돈을 준다. 사장 부인은 영주를 쓰다듬고 껴안고 난리다. 행복이 과할수록 우리의 본능은 어둠의 수렁에서 스멀거리고 올라오는 습한 어둠의 기운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장은 별로 큰 사고를 치지 않고 특유의 어둠을 유지하고 있으며 영주도 발톱을 숨긴 채 큰 결심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과한 부인에게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둘 수 없다. 이 무렵 부인이 승부수를 던진다. 부인은 사장이 교통사고로 괴로워한다고 영주에게 말한다. 사장은 최소한 <밀양>(2007)의 가해자처럼 셀프 사면으로 용서의 의욕을 꺾는 파렴치한이 아닌 모양이다. 영화는 영주를 윤리적 질문으로 몰아간다. 가해자는 실수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가해자 부부는 누군지도 모르는 영주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 영주는 <밀양>의 윤리적 한계선인 용서를 넘어서서 기꺼이 가해자의 요청대로 그들의 의사 가족이 될 것인가. 그게 가능하고 그래도 되는 걸까.영화는 탈주의 욕망으로 이글거리지만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차성덕 감독 본인이 교통사고 유가족으로 살아왔다고 밝혔다. 충동, 공격성, 암울함, 긴장의 분위기는 자신의 자전적 환상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어떻게 자신이 그 고통의 통로를 벗어나 걸어왔는지의 보고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참하지만 버텨나가려는 현실에 난입해 들어오는 실재계의 어두운 그림자, 그에 대한 통제가 이 영화가 갖는 매력이다.

2018.10.14
이상경

살아있는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죽음이라는 사건이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 경험될지 살아있는 한 결코 알 수 없다. 한편으로 죽음이라는 경험은 인간의 인식 영역 밖에 있으면서도 인간의 삶 가까이에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식 영역을 넘어선 것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연의 압도적 풍광은 가장 자주 말해지는 소재다. 인간은 거대함 앞에서 초월과 무한을 상상한다.약초꾼인 남자는 오랜 기간 떨어져 살아서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도 모르는 아들과 짧은 시간 산에서 함께 생활한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상 이들이 산 속 생활과 산을 오르는 일의 육체적 고됨과 산의 정상에서 마주하는 끝없는 풍경 사이를 오가는 것이 전부다. 죽음을 앞둔 남자에게 산이 생활 공간의 일부라는 설정은 남자가 아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가르치는 것이 삶과 죽음 모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밤빛>에는 죽음을 앞둔 남자와 그의 아들, 어둠과 빛, 풍경과 생활이 이어져 있는 세계가 있다. 내게 <밤빛>에서 마음에 남는 것은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압도적 풍경의 재현보다 다른 것에 있었다.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이 어두운 화면 속에서 조그만 움직임 소리가 들리면, 곧이어 남자가 초에 불을 붙인다. 눈을 감았을 때 차단되는 빛이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암전은 종종 죽음이나 끝을 의미한다. 암전은 정지 없이 흘러가는 영화의 흐름에 단절을 만든다. 하지만 곧 남자가 초에 불을 붙일 때마다 이것이 암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밤빛’이란 단어의 이미지는 쏟아질 듯 하늘을 가득 채우는 별빛이 아니라 그 캄캄한 새벽의 어둠에서 느껴진다. 영화의 암전 역시 어디까지나 검은 빛의 영사다. 영사기의 불이 꺼지면 극장의 불이 켜진다. 극장의 어둠은 우리가 아직 완전한 어둠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어두운 방에 초를 켠 남자는 아들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보곤 방문을 나선다.

2018.10.14
김나영

  김무영 감독의 영화 <밤빛>은 과장되게 말하자면 시대를 역행하는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대의 빠른 박자를 선호하는 영화들과는 다르게 묵묵하다는 말이 어울리게 정말 천천히 서사가 흘러간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밤빛>의 아버지 역할의 희태가 등산을 하듯이 관객이 <밤빛>이라는 영화를 상영시간 동안 등반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 우직함에 있다. 배경인 방태산처럼 이 영화는 천천히 관객들에게 매력을 하나둘 풀어내기 시작한다.     <밤빛>의 서사는 현재의 다른 상업영화들처럼 역동적이거나 반전이 있거나 하진 않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희태가 방태산에서 약초를 캐며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어느 날 10년 전 헤어진 아내에게서 온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아내는 아들 민상이 희태의 호적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보고 희태는 죽기 전에 아들을 보고 싶어 2박 3일 동안 희태의 집에서 보낸다는 조건으로 수락한다. 영화는 아버지 ‘희태’와 아들 ‘민상’이 보내는 2박 3일의 이야기와 그 이후를 다룬다. 처음 ‘민상’이 아버지의 산속 집에서 지내는 장면은 <집으로>의 상우가 처음 할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집으로>가 일련의 사건들로 할머니와 상우의 극적인 관계 발전에 집중했다면 <밤빛>은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변화들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느슨할 수 있는 서사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느린 호흡과 산이라는 배경이다. 영화 초반에서도 산에서 희태가 버섯들을 캐는 장면들을 계속 담아내며 의미 전달의 과잉이라 할 정도로비슷한 장면들을 계속 내보낸다. 산을 오르는 아버지와 아들의 장면을 화면 밖에 나갈 때까지 장면 속에 담고 나서야 비로소 장면이 변화된다. 이런 느린 호흡들은 몇몇 관객에게는 지루함을 유발할 수는 있겠으나 오히려 감독이 말하려는 바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연출에는 산이라는 배경도 한몫을 한다. 영화 내내 아버지 ‘희태’와 아들 ‘민상’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호칭마저도 아들 3일의 시간이 후 ‘민상’이 떠나는 장면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이라 하지 않고 아들은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서사만 본다면 그들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큰 변화들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산이라는 배경 속에서 부자가 함께하는 장면들에서 부자간의 심경 변화를 대사나 극적인 연출보다 더 효과적으로 담아내었다.     <밤빛>은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이다. 음식으로 비교해 본다면 평양냉면에 비할 수 있겠다. 투박하고 우직한 부분이 이 영화의 장점이자 단점일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본다면 아버지 ‘희태’가 산 정상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객들도 영화가 가지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것들에 대해 김무영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2018.10.13
박재범

한국영화에 있어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꾸준히 나왔었다. 2000년대 이후를 살펴보자면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 권수경 감독의 <맨발의 기봉이>,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 천만 관객의 영화 이환경 감독의 <7번 방의 선물> 정도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장애’라는 소재를 다룰 때 다른 소재들 보다 더욱 조심해야 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화에서 장애에 대한 잘못된 풀이는 현실에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상처를 주고, 일반 관객들에게는 해당 장애에 대한 편견을 씌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영화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장애인들을 향한 영화의 표현은 불쌍하거나, 웃기는 소재로 사용하거나 정도였다. <7번 방의 선물>이 흥행 면에서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많은 비난을 받은 이유에는 주인공 ‘용구’의 속성인 지적장애를 개그요소로 희화화 시킨 점도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감독의 장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영화 안에 내포되어 관객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전파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김진유 감독의 <나는 보리>는 청각장애에 대한 감독의 깊은 생각이 영화에 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감독은 청각장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 없이 접근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청각장애를 가진 가족 사이에 홀로 들을 수 있는 열한 살 소녀 ‘보리’를 창조하였다. 여기까지도 사실 ‘장애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비슷하지 않은가?’라는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보리의 소원이 ‘가족들이 같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가 아닌 ‘소리를 잃고 싶다.’라고 나오면서 이 영화는 장애인들에 대한 해석이 동정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보리가 소원을 빈 이유는 자신도 가족들처럼 귀가 들리지 않음으로써 같은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 서 이기도 하다. 보리 가족 안에서는 보리가 다른 존재이지만 그들은 틀린 게 아닌 다름으로 여기고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소중한 같은 가족 공동체이고, 같은 가족 구성원으로 여기고 있다.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 이 영화가 빛나는 이유는 이와 더불어 청각장애에 대한 사회의 여러 시선을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영화들이 장애를 가진 주인공에 대해서 부정 혹은 긍정의 시선을 일관적으로 보냈던 것과 비교해서 이 영화는 장애에 대한 반응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부터 시작해서 보리 모녀를 상대로 사기를 쳤던 옷가게 직원들, 보리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보리 친구와 친구 아빠까지 많은 입장에서의 시선들을 통해 감독은 장애에 대해 기존의 영화들이 담아내지 못했던 부분들을 더 담아낸 것이다.   김진유 감독은 영화의 GV에서 청각장애에 대한 세심하고 올바른 접근이 자전적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가 생각날 만큼의 한국 특유의 가족 정서를 담아낸 연출과 김아송, 이린하 같은 아역배우들의 열연 또한 이 영화를 빛나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에 풀어낸 감독의 역량이 주효했다. 모기장 안에서 수화로 대화하는 보리를 보고 보리 엄마가 “수화가 많이 늘었구나.”는 대사는 김진유 감독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줬다. 이는 보리의 성장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장애에 대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2018.10.13
박재범

* 영화에 내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이옥섭 감독의 <메기>는 어느 정형외과의 엑스레이 검사실에서 애정행각을 하는 연인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이후 성관계를 하는 두 하반신의 엑스레이 사진이 발견되면서 병원이 발칵 뒤집힌다.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간호사 여윤영(이주영 분)은 그 엑스레이 사진이 자신과 자신의 애인 성원(구교환 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진의 주인공이 윤영과 성원이 아님을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고, 전지적 시점의 보이스오버내레이션의 화자 역시 윤영에게 "그건 윤영씨가 아니에요" 라고 외치지만 윤영에게 들릴 리 없다. 이윽고 병원에서 이러한 의심과 불안에 시달린 사람은 윤영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메기>의 시놉시스에 적혀있는 이 에피소드는 그러나 워밍업에 불과하다. 영화는 크게 세 개의 굵직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있는데, 엑스레이 사진이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와 성원의 반지 맥신 에피소드, 성원과 성원의 전 여자친구 지연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관객이 이미 답을 알고 있었던 첫 번째 에피소드가 연습게임이었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인물이 모르는 답을 관객들도 알지 못한다. 이 두 가지 감정 사이의 진자운동은 곧 이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이옥섭과 구교환의 공동작업은 그들의 이름만 보고도 기꺼이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층이 존재할 정도로 이미 브랜드화 됐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대사, 연기가 모두 뛰어난 유머를 구사하며 객석을 폭소하게 만든다. 디제시스 바깥의 배경음악과 보이스오버내레이션, 인물의 행동이 동시에 맞아 떨어지는 반지 에피소드의 연출은 귀엽고 재기발랄하며, 기존 영화들에서 보기 힘든 방식의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불법 촬영과 데이트 폭력을 이야기하기에 그런 방법들이 적합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크게 세 가지 에피소드로 나누어 이야기했지만, 영화의 시퀀스에는 손글씨로 적힌 작은 소제목 같은 것이 달려있고, 성원이 윤영의 허벅지에 행성 모양의 타투를 그려주는 장면처럼 개별의 장면들이 흩뿌려진 채로 존재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큰 구조 안에 포획되지 않고, 느슨한 농담처럼 존재하는데 이는 장편의 호흡보다는 단편의 리듬에 가깝게 느껴졌다.또 싱크홀이라는 소재가 믿음과 의심이라는 테마와 갖는 관계도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싱크홀은 추악한 진실일까, 아니면 의심이 만들어낸 균열일까. 그것이 진실의 구덩이라면 왜 구덩이를 빠져나오기를 권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싱크홀이 등장하는 순간을 떠올리면 더 종잡을 수 없어진다. 분명 <메기>는 청년들이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다룬답시고 인물들을 극한의 궁지로 몰고가 파괴적인 결말로 해소해버리는 일련의 무책임한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다른 길이 돌파구가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애초에 돌파에 대한 의지가 있는 걸까? 뼈있는 농담에서 방점이 뼈에 찍혀있는지 농담에 찍혀져있는지 영화 스스로도 정확히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 아닌지, 다소의 아쉬움이 남는다.

2018.10.13
서하연

나는 내가 읽지 않은 필독도서, 나는 나의 죄인 적 없으나 벌이 된 사람이다.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나는 나에게서 당신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를 상상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상상을 빌려오는 사람이다. ㅡ김애란의 소설 <영원한 화자> 중에서 건실한 주위 조언과 나를 아끼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며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 샌가 내가 나로 사는 것이 고역이 되고 급기야 살아있다는 실감도 들지 않게 된 인물, 자영(최희서). 8년째 행정고시 공부만 해오던 어느 날 깨닫는다. 자신이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그런 류의 죽음이 있다. 가족도 친구도 세상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내밀한 죽음.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지만 너무 바쁘고 지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죽음. 어느새 내 인생의 한 시절이 닫혔고, 나는 더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며, 나의 내부를 채우던 뭔가가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서의 감각. 자기 ‘내면의 목소리’는 커녕, ‘몸의 기본적인 요구’에도 제대로 귀기울인 적 없던 자영에게 당장 시급한 것은 ‘삶을 되찾는 것(survive)’이다. 하지만, 방법을 모른다. 명연자실하여 주저앉은 육교에서 우연히 조깅 중이던 현주(안세희)의 생명력 가득한 육체를 마주하고, 강한 부러움과 동경을 느낀다. 그리고 달리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녀의 첫 행동이 웃프다. 인터넷 검색과 유투브 영상으로 달리기를 ‘지식’으로 익히려 한다. 핸드폰에 매달려 달리기에 대해 학습 하던 중,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도 한 때는 아무 준비나 학습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달릴 수 있는 존재였다. 다행히 본인의 의지와 현주의 도움으로 그녀의 일단계 미션(몸의 생존)은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할 뿐, 정말 어려운 문제가 주어졌다 : 제대로 사는(live) 것. 그런데 산다는 것이 여간 아리송하지가 않다. 누구에게나 한 번 주어지기에 앞선 생들의 ‘기출 분석’도 무의미하고 "산다"는 것은 계속적인 과정인지라 중간평가도,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덧없다. ("~하게 살았다"는 최종 평가는 "살다"가 완료된 후에 가능하고, 이는 ‘살아있는 나’에게 무의미한 일이다) 이 끊임없는 "살다"의 과정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며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영은 엄마에게 묻고 (엄마는 얼마나 오래 달려봤어?) 현주에게 묻지만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해?) 그 질문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산다는 것은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진정한 나’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러닝메이트도 있고 주위의 따뜻한 응원도 있다면 좋겠으나, 오래 달리기를 할 때 정작 우리는, 저마다의 에너지와 경험으로 달린다. 자신 만의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자신 만의 방식으로 자신 만의 세계를 달리는 것이다. 한 사람의 단독자로써. 노력한 만큼 정직한 결과가 돌아오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때로는) 내 ‘몸’ 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내려면, 강인한 에너지와 정신의 면역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득하고 유지하는 첫걸음은, 인생의 주체인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아닐까. 동경하는 ‘그녀’와의 동일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녀에 대한 이해’이고 이를 ‘연대’로 이어갈 순 있겠으나, 이것이 내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순 없다. 다시 한번, "산다"는 것은 과정이며 ‘완료’는 단지 ‘죽음’일 뿐이기에,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해답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멈추지 않고 ‘탐구하는 시간’이 바로 ‘내가 살아있는 순간이자 증거’가 될 터이므로. 자영은 ‘자기 탐구’와 자신의 ‘인생 탐구’를 이제 막 시작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든 우리 역시 그렇다. 모든 순간이 나의 단 한 번 생(生)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처음 겪는 순간이다. 언제나 첫 시작, 새로운 탐구의 출발인 셈이다.

2018.10.13
김지윤

 <밤빛>은 집요함과 건조함이 섞여 독특한 환경을 만들어낸다. 요즘 시대에는 과잉으로 느껴질 법한 느림은 달리 말하면 집요함이고, 거기에 음악과 대사는 절제된다. 여기서 <밤빛>은 관객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독특한 기록과도 같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장면은 도입부의 대화 신이다. 두 남녀는 간결한 대사만을 주고받으며 카메라는 말하는 인물을 비춘다. 달리 <밤빛>에서 이보다 빠르고 익숙한 쇼트의 운동은 보지 못했다. 또한 영화는 두 부자의 인력과 척력 사이에서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밤빛>은 최근 유행하는 ‘이런 삶도 있다’라고, 과시적이고 우렁차게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삶은 제시되기 보단 스크린 안에서 얼어붙는다. 설령 계절이 여름이라 할지라도. 따라서 <밤빛>의 모습에 찬찬히 적응하다보면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 기분 좋은 무능력함 속에 있다. 나 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탁월한 안정감, 이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정작 영화 후반부의 우리에게 각인된 밤빛 이미지는 무능력함과 관계없어 보인다. 주관 시점 쇼트로 봐야할지, 또한 처음 등장한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곤혹스러움은 무엇인지, 지속되는 음악 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우리는 정하지 못했다. 언제든 준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느린 영화였지만, 희태가 밤의 산머리에서 고개를 드는 장면만으로 우리는 그 세계에 들어간다. 이상한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눈 덮인 산과 아들의 신이 나온다. 너무나 많은 순간이 밤빛동안 있었다. 요동치는 감정과 생각 속에서 기록성과 기분좋은 무능력함은 사라진다. 굳이 말해보자면 최후반의 영화적 체험은 고전적이지 않고 아니라 현대적이다. 그러니 전부 아울러, 그리고 <밤빛>에 존중을 담아, <밤빛>을 영화적이지 않고 <밤빛>적이다고 해보자.

2018.10.13
강원우

이 영화를 어떤 장르적 범주로 묶을 수 있을까. 버디 무비인가, 가족 드라마인가, 스크루볼 코미디인가, 아니면 모험 영화인가. 쉬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은 독특한 지점에 서 있는 영화다. ‘어디서 본 듯한’ 요소들로 가득한데, 어떤 한 장르의 울타리에 넣기는 곤란하다. 여러 장르의 관습을 한 뼘 정도 비틀어내는데, 이 한 뼘들이 모여 독특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단짝인 소년과 소녀가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보희(안지호)는 이름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을 당한다. 어머니가 없는 녹양(김주아)은 보희와 달리 활발하고 당당한 소녀다. 엄마와 둘이 사는 보희는 어느 날,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희는 녹양과 함께 아빠를 찾아 나서고, 둘의 삶에 다양한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한다.서사를 이끄는 중심 사건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흔하고 평범한 소재지만, 사건의 해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주인공의 성격과 관계다. 영화는 ‘소녀’와 ‘소년’에 부여되어 온 관습적인 속성을 거부한다. 소심하고 눈물이 많은 보희는 적극적이고 모험심 강한 녹양을 동경한다. “나는 남자답지 못하다”며 한탄하는 보희에게 녹양은 “넌 충분히 남자답다”고 말한다. 성 역할을 대하는 감독의 시선과 이것이 주는 신선함, 이를 훌륭하게 재현해낸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중요한 묘미다. 영화가 보여주는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와 재치 있는 대사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컨벤션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스크루볼 코미디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이유는, 여성과 남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결코 두 사람을 이성애적 관계로 묶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성들이 고난을 극복하며 우정을 다져나가는 버디 영화의 관습을 차용해 여성들의 유대를 그려냈던 <델마와 루이스>(1991)처럼, <보희와 녹양>은 성적 긴장감을 부여하는 대신 두 청소년이 서로를 격려하고 성장해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보희와 녹양>은 스크루볼 코미디와 버디 무비를 적절하게 뒤섞어 관객의 흥미를 자아낸다.인물들이 여러 공간을 거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는 점에서 <보희와 녹양>은 로드 무비의 성격 또한 지니고 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초록색의 이미지와 밝은 화면은 마치 판타지 세계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 편의 모험극 같은 이야기지만, 마냥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류’에 속하지 않는 두 청소년이 겪는 소외감과 고민, 이를 극복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요소다. 어떤 영화는 출연 배우가 전부다. 어떤 영화는 서사가 전부이며, 또 어떤 영화는 시각적 스타일에 주목해야 한다. 장르로서의 재미에 충실한 영화도 있다. <보희와 녹양>은 영화의 여러 요소가 빚어내는 조화와 균형이 빛나는 영화다. 장르의 컨벤션이 주는 안정감과 그것을 적절히 재배치하는 감독의 감각은 관객에게 산뜻한 활력을 선사한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행복한 표정을 기억한다. <보희와 녹양>은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선연한 초록빛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2018.10.13
윤영혜

이 영화는 이옥섭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이다. 영화는 여운영과 그의 남자친구가 X레이실에서 성관계를 하는 장면이 찍히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사건을 수습하려 하지만 병원에 이상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마리아 사랑병원의 부원장역을 맡은 문소리분과 간호사 역을 맡은 이주영의 호흡은 어울린다. 어릴 적에 다른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부원장과 자신의 남친을 믿지 못하게 된 여운영은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다. 영화의 나레이션은 메기가 맡고 있다. 메기는 제 3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전달한다. 영화는 서로간에 믿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결말을 가져오는지 싱크홀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보여준다. 여운영의 남자친구인 성운도 곳곳에 싱크홀이 출몰하면서 직업을 얻게 된다. 작업장에서 그는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를 잃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그는 자신의 동료의 발가락에 있는 반지를 자신의 반지로 착각해 거의 뺏다시피 하지만 결국 그 반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흐르는 발랄한 음악들, 그리고 하늘에 달처럼 떠 있는 커다란 반지는 영화적인 재미를 톡톡히 느끼게 해준다. 메기의 나레이션도 등장 인물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싱크홀이 곳곳에서 발생하는 건 우리가 그만큼 내 주위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까? 터무니없는 말들을 지어내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것까지. 가장 가까운 연인끼리도 솔직하게 묻지 못하고 의심부터 하는 것, 여운영은 남자친구말고 전여친의 말을 믿기로 한다. <사건은 편집되고 왜곡된다> 영화에 나온 말처럼 우리는 어느새 불신의 구덩이를 깊게 깊게 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하나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내가 믿고 싶은 것으로 내가 좀 더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을 어느새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어쩌면 폭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자신의 동료를 도둑으로 의심한 성운이나 전여친의 말만 믿고 자신의 남친을 여자를 학대하던 사람으로 믿어버린 여운영도 마찬가지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구덩이를 더 파지 말고 거기에서 빠져 나와라>라는 쪽지처럼 감독은 더 이상 우리안의 싱크홀을 확대하고 재생산해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객관적인 눈을 지닐 필요가 있다고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2018.10.13
이미정

윤영은 남자친구 성원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집을 나선다. 재개발 문제로 이사할 집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인데, 성원이 괜찮은 집을 발견했고 다른 사람이 먼저 계약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윤영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성원이 알려주는 길대로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동네길을 내달린다. 성원이 알려준 대로 커브를 꺾는 순간 자전거의 운동이 멈춘다. 그곳은 긴 계단이 가파르게 이어진 곳이었고 성원은 아래에서 여기라며 손짓을 한다. 윤영은 성원이 의심스럽다. 의심은 구체적인 상상으로 윤영의 마음속에서 더욱 부풀어간다. 어젯밤에 이 동네 지리를 알아봤을 거야. 그리고 이 계단을 찾았겠지. 내가 자전거를 타고 올 걸 예상했겠지. 날 죽이려고! 윤영의 상상 장면이 끝나자 진행 불가능한 자전거의 운동이 재개된다. 놀라웠다. 자전거는 직선이나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화면에선 자전거가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윤영이 자전거를 잡고 빙글빙글 돌자, 지면에서 자전거가 떨어진다. 로우 앵글로 잡힌 화면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윤영과 자전거가 경쾌하게 돌고 있다. 윤영이 손을 놓기만 하면....... 긴장감이 고조되던 순간, 자전거가 파란 하늘을 가른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전거가 계단 위를 구른다. 자전거는 박살이 났고, 성원의 퍽 놀란 표정이 보인다. 그 순간 아마 얌전히 앉아있던 나도 성원 같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이옥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기>는 눈이 즐거운 영화다. 풍성하고 감각적인 미장센이 영화를 보는 내내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프레임 안에 모든 것들이 분명 일상적이고 친숙한 공간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는지 놀라울 뿐이다. 전체적인 색감, 인물들의 의상, 주인공 윤영의 집 안 소품들, 익숙하지만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 마찬가지로 익숙하지만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의 행동.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소제목을 달고 펼쳐지는 작은 이야기들은 각각 단편영화로 내놓아도 될 정도로 독립적이며 완성도가 높다. 여러 이야기가 모인 만큼 영화가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믿음이라는 키워드는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한 편의 영화로 아우르며 부드럽게 이어준다. 반복해서 얘기하자면, <메기>가 익숙한 주제와 소재를 완전히 새롭게 감각하게 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첫 문단에서 윤영의 행동을 예로 들었는데, 동기는 파악하기 쉽다. 윤영이 의심을 넘어 성원을 향한 분노를 표출한다라는 한 문장이 있다고 치자. 이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대사로 전달할 수도 있고 클로즈업으로 윤영의 감정에 이입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메기>는 영화 내적으로, 또한 감독의 태도 자체가 진부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것 같다. 원을 그리며 돌다 날아가는 자전거는 현실이 전복되는 순간이자, 영화가 할 수 있고 영화가 선사하는 본질적인 움직임이며 쾌감이다. 윤영은 출근카드를 찍기 워해 정숙한 병원에서 팔짝팔짝 뛰고, 현실을 초월한 존재인 메기가 어항에서 튀어 오른다. 인간의 흔들리는 믿음, 균열된 믿음으로 인해 확신에 이르렀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확신에서 탄생한 구덩이에 인간은 빠질 수밖에 없을까. 설령 구덩이에 빠지지 않더라도 인간은 구덩이를 응시한다. 그때, 구덩이도 인간을 응시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과 확신이, 수없이 반복되어온 이야기가 새로운 영화가 됐다. 고착화된 한국영화에 질린 이들에게 <메기>는 특별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이제는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피로하게 재현하는데 머무르는 영화보단 이렇게 통통 튀고 발랄한 젊은 감각의 영화가 많이 나왔음 한다. <메기>가 앞장서서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 이렇게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메기>는 주인공이 사직서를 쓰는 장면에서 관객들을 유쾌하게 웃음 짓게 하는 영화다.

2018.10.13
이주원

근래의 한국독립영화들은 마치 다루지 않으면 섭섭하다는 듯 직접적으로 한국의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다룬다. 그것이 얼마간의 은유를 경유한 상징을 통해서든, 직접적인 방식으로든 말이다. 경우에 따라 그러한 사회적 의제들을 능숙하게 각색하여 매끄럽게 영화의 내부로 끌어오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그 과정에서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의식은 과도한 폭력이나 억지스러운 심리묘사로 이어며, 그 결과 영화의 바깥과 소통하고자 했던 시도들이 오히려 영화의 세계를 한 없이 폐쇄적이고 상투적인 것으로 만들고 만다. 물론 근본적으로 따졌을 때 정치적이지 않은 영화가 존재할 수 있겠냐 만은, 근 몇년간 한국의 독립영화들이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했던 현실의 자화상이 결국 영화의 장르적이고 소재적 소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은 이제 기시감이들 정도로 익숙하다. <메기>에도 이러한 사회적 반영이 수두룩하다. 재개발을 평화적으로 반대하기 위해 바캉스를 즐기는 듯한 모습으로 시위하는 사람들, 직업과 집이 없는 청년들, 갑자기 발생한 싱크홀에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투기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심리 등.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사회상을 다른 방식을 다룬다. 영화는 분명히 뚜렷하게 현실의 문제들을 영화의 내부로 끌고 오지만, 동시에 그것을 진지하게 다룰 마음이 없어 보인다. 아니,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다기 보다, 현실적인 풍경을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보여줄 마음이 없어 보인다. 재개발에 대해 평화 시위를 하는 모습은 저항적이고 정치적인 풍경이기보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것으로 비춰지고 지나갈 뿐이며, 집이 없고 직업이 없는 성원의 문제는 윤영과의 연애, 잃어버린 반지 등의 상황들 속에서 코믹한 순간과 융화되어 버린다. 싱크홀에 쓰레기를 버리는 심리는 메기의 내레이션으로 언급되고 지나가버리고 만다. 영화는 마치 이러한 문제들이 별것 아니라는 듯, 혹은 이런 문제들을 왜 진지하게 들여다 봐야하냐는 듯 훑고 지나가 버리거나 판타지적 표현들 속에 녹여낸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태도가 단지 시니컬하게 현실을 바라보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보다도 영화는 애초에 무언가를 ‘현실적’으로 생각하거나 판단하거나, 보여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는 현실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데에 관심이 없으며, 그렇다고 그것을 장르적이고 영화적인 관습들 속에서 녹일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메기>에는 장르적이지만 전혀 그럴듯하지 않고, 판타지적이지만 전혀 환상적이지 않은 순간들이 차고 넘친다.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의심’이지만, 여기에는 ‘의심’ 표현하기 위한 서스펜스나 심리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섹스와 코미디, 판타지와 상상적 표현, 갑작스런 노래들 속에서 얽히고 섥히는 연애가 있고 노동이 있다. 그러나 거기엔 아름다움이나 환상은 없고 다만, 현실이 있고 의심이 있다. 갑작스러운 싱크홀, 섹스하는 엑스레이 사진, 메기와 지진, 연인과 장난치는 남자, 극단적인 윤영의 상상력. 이런 판타지적이고 비현실적인 표현의 난장 속에서 ‘의심’과 ‘현실’이라는 키워드는 영화를 끌고 가는 중요한 동력이면서도, 동시에 이 영화를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로 이끄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메기>는 현실이 아닌 ‘영화’가 된다. 현실이라는 구덩이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2018.10.13
구형준

                                                         그녀들의 환절기                                                                                                            김석화 김준식 감독의 <계절과 계절 사이>는 두 여자의 관계와 각자의 정체성을 풀어내는 영화다. 해수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 와 까페를 연다. 서늘한 표정에 저음의 목소리를 지닌 해수. 그녀는 무표정에 말이 거의 없고 목에 스카프를 항상 두르고 있다. 이 까페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고등학생 예진이 드나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해수와 달리 예진은 맑고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다. 투샷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냐고 묻는 그녀는 어떤 주저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해수가 운영하는 까페는 테이블 외에 어떤 인테리어도 없이 비어 있다. 해수처럼 무미건조하지만, 비밀스런 그녀와 달리 어떤 비밀도 숨을 곳이 없는 환한 공간이다. 그래서 까페라는 공간과 해수는 다소 어울리지 않고 섞이지 않는 느낌이 든다. 이 곳에 예진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벚꽃으로 꾸미기 시작하면서 공간은 변화한다. 조화를 이어붙이지만 꽃잎이 늘어가고 봄처럼 공간의 온도가 올라간다. 해수도 약간의 활력을 띠고 공간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까페는 인물과 인물, 계절과 계절이 얽히는 곳으로 지정되는 것 같다.   두 여자의 감정을 조명하면서 영화는 관계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틈처럼 그녀들 각자의 환절기를 덧붙인다. 가령 예진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감정만 있고, 그것이 동성애인 것을 다른 레즈비언 친구를 통해 인지할 뿐이다. 여고생인 예진은 사랑앞에서 동성애 정체성을 맞닥뜨리는 중이다. 정체성보다 감정과 행동이 앞지르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억압하지 않고 표출한다. 예진이 꺾인 사랑을 통해 어느 계절에 다가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지독한 환절기가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만 안다. 예진과 달리 해수가 트랜스젠더인 것은 영화 곳곳에 보인다. 하지만 관계와 감정보다 정체성의 상처가 앞서 있다. 자신에 대한 억압으로,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장소에서 해수의 환절기는 어떻게 지나갈 것인가. 영화 후반 그것에 응답하는 해수를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녀는 다른 계절로 성큼 다가선다.  <계절과 계절 사이>는 개인의 서사를 통과 중인 인물과 통과한 인물이 섞여 있다. 또한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 이중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에 있어 최대한 심호흡을 한 듯 보인다. 영화 말미 까페에는 지지 않는 벚꽃이 피어있고, 창 밖으로는 눈이 내린다. 두 계절 사이에 놓인 해수가 예진이 하다 만 꽃잎들을 계속 이어붙일지 궁금해진다.

2018.10.13
김석화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제안을 받고 찍은 작품이다. 메기는 지금까지 봐오던 영화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것 저것 많이 차려진 신기한 밥상인데 맛있다. 불량식품처럼 알록달록 시선을 잡아끄는데 정작 재료는 신선하고 먹으면 건강해 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메기>는 그야말로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영화다. 보는 내내 재미있고, 보고나서도 웃게 된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이야기 속에 물들지 않은 단단하고 묵직한 메시지가 흐른다. 마치 단편을 이어 엮은 듯한 산발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소소하게 담고 있는 메시지도 많지만 분명하게 이 영화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 또한 여러 이야기들을 뚫고 자나가는 동안 꼭 쥐고 흘리지 않는다. 영화 속 이야기들은 황당하다. 병원 엑스레이실에서 남몰래 섹스를 즐기다 갑자기 엑스레이 사진이 찍히고 그 사진 때문에 병원 직원들은 모두 결근을 하게 된다. 여자친구가 선물한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나중에 보니 친한 동료가 그 반지를 발가락에 끼고 있다. 그런데 그 반지를 되찾고보니 그건 손가락에는 들어가지도 않는 애초부터 발가락반지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들은 영화가 끝나는 내내 툭툭 튀어져 올라오지만 복잡하게 돌려 말하거나 거창하게 꾸미지 않는다. 나의 한심함이나 너의 찌질함, 우리들의 아쉬운 인생사가 영화라는 만화경 위에형형색색 펼쳐지는 느낌이다. 찌질하기 그지 없는 대사들은 기발한 상황 속에서 유쾌한 실수들을 자아내는 데에 꼭 알맞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구덩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일이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만나는 구덩이들을 다각도로 나열하면서 구덩이를 더 키우는 일들이 어떤 것이고, 구덩이에서 빠져냐오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살면서 만나는 구덩이들은 여러 형태로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그 속에 빠뜨리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구덩이를 빠져 나오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지 않을 때가 많다. 구덩이를 넓히고 구덩이를 빠져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은 옴니버스식의 이야기들 속에서 주름졌다 펼쳐지며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아코디언 같다. 영화 <메기>는 흔들리는 사람들의 흔들리는 이야기이자 불안정한 이들의 불안정한 삶이다. 형광빛을 뿌리는 캐릭터들의 빛나는 연기는 부조리극 같기도 하고 블랙코미디 같기도 한 무거운 메시지들을 똘똘 말아 감싼 우스꽝스러움으로 아름답게 피어 오르지만 나약하고 흔들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메기는 흔들림없이 고요하고 어항의 밑바닥에 묵직하게 깔려있다. 메기는 산발적인 이야기들을 하나로 꿰는 구심점 같기도 하고 불안정한 사람들의 위안같기도 하다.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이야기들이 삐걱대는 듯 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이 영화는 곧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무겁고 어두운 고민들을 감싸 안은 나의 모습도 저렇게 밝은 빛으로 피어오를 수 있기를.

2018.10.13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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